중부대 명예교수

 

안민영의 승평계 ‘우산에 지는 해를’

우산(牛山)에 지는 해를 제경공(齊景公)이 우럿더니
공덕리(孔德里) 가을 다를 국태공(國太公)이 늣기삿다
아마도 고금영걸(古今英傑)의 강개심회(慷慨心懷)는 한가진가 하노라

우산에 지는 아름다운 해를 보며 제나라 제경공이 울었더니, 공덕리의 가을 달을 대원군이 바라보며 느끼셨다. 예나 지금이나 영웅들이 느끼는 강개 심회는 한가지인가 하노라.

중국 제나라 경공이 우산에서 노닐다 아름다움에 반해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슬피 울었다는 고사가 있다. 대원군을 이 제공경의 고사에 비겨 노래했다. 국태공은 대원군의 존칭이며 고금영걸은 제경공과 더불어 대원군을 지칭한 말이다.

안민영의 개인 가집 ‘금옥총부(金玉叢部)’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석파대로께서 임신년 봄 공덕리에서 쉬시었다. 하루는 석양에 문인들과 기녀 및 공인들을 거느리고 방소처에 오르셨는데, 풍악을 크게 베풀고 권하며 즐기는 사이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이에 위연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내가 지금 오십여 세인데, 남은 해가 얼마이겠는가. 우리들은 역시 다음 생에서 한곳에 모여, 금세에서 다하지 못한 인연을 잇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시니,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머금었다. (금옥총부)

이 작품이 지어진 임신년 1872년은 고종 9년으로 대원군이 섭정하던 시기다. 대원군이 예인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며 ‘내세’ 운운하면서 탄식하는 말을 토로하자 좌중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다.

대원군이 정치적 격변 속에서 자신이 머지않아 실각할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안민영은 이런 시를 지었는지 모른다. 그는 대원군의 복잡다단한 심사를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현재의 치세가 태평성대라는 것을 널리 알리고 또한 왕실의 진연 의식에 버금가는 계회를 열어 대원군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했다. 이를 하축(賀祝)하기 위해 모임을 결성했다. 이것이 승평계다. 승평곡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축하 공연으로 12곡의 레퍼토리를 묶어 만든 곡이다. 현재 발굴된 가집 중 곡조별 분류 체계를 취한 가장 작은 개인 가집이다.

고종이 즉위한 지 만 10년이 되는 1873년 하축연이 열렸다. 승평은 태평성대를 달리 표현한 말로 나라가 태평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해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계기로 모든 권좌에서 물러났다. 사실상 대원군의 실각이었다.

위 시조가 그것을 예언해준 셈이 됐다. 승평곡 12곡은 전부가 대원군에 대한 헌사다. 이 중 3번 째 곡 ‘중거삭대엽(中擧數大葉)’이다.

산행(山行) 육칠리(六七里)하니 일계(一溪) 이계(二溪) 삼계류(三溪流)ㅣ라
유정익연(有亭翼然)하니 임사당년(臨似當年) 취옹정(醉翁亭)을
석양의 생가고슬(笙歌鼓瑟)은 승평곡(昇平曲)을 알윈다

초장은 깊은 산중에 자리 잡고 있는 삼계동의 위치를, 중장은 그 속에 위치한 대원군의 정자가 바로 구양수가 이름을 붙였다는 취옹정과 흡사함을 말하고 있다. ‘유정익연’은 정자가 있어 날아갈 듯하다는 뜻이고 ‘임사당년’은 당년의 취옹정과 흡사하다는 말이다. ‘생가고슬’은 생황과 북 그리고 비파소리를, ‘승평곡’은 태평곡을 말한다. 종장에서는 승평계 하축연이 개최되는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곳에서 안민영을 비롯한 여러 예인들은 당시 연회의 좌상객이었던 대원군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며 태평성대 승평곡을 불렀던 것이다.

대원군은 1873년 모든 권좌에서 물러난 후 민비와의 갈등으로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임오군란, 갑오개혁 등으로 은퇴와 재집권을 거듭했으나 실각, 79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세상일이다. 남는 것은 그래도 예술뿐, 지나고 보면 모든 권력은 허무한 것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