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

‘병산육곡(屛山六曲)’은 권구(1672~1749)가 지은 6수의 연시조로 작자의 향리인 안동군 풍천면 병산리를 제목으로 해서 지은 작품이다. ‘도산육곡(陶山六曲)’ 등 육가계(六歌系) 시조의 맥을 잇고 있으며 세사를 떠나 자연 속에서의 안분자족(安分自足) 하는 삶을 그리고 있다.

부귀라 구(求)치 말고 빈천(貧賤)이라 염(厭)치 말라
인생백년이 한가할사 사니 이 내 것이
백구야 날지 말아 너와 망기(忘機)하오리다

첫째 수다. 부귀라고 구하지 말고 빈천이라고 너무 싫어하지 말라. 인생 백년을 한가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이 내 마음이다. 백구야! 날지 말아라, 너와 더불어 세상을 잊고 살아가련다. 속세와 떨어져 일생을 저 백구처럼 한가롭게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권구는 이현일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당시 영남학파의 거두인 이상정 등과 교유하면서, 평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1716년 병산에 와 살았으며 1723년에는 고향인 지곡으로 돌아갔다.

보리밥과 생채(生菜)를 양(量)마촤 먹은 후에
모재(茅齋)를 다시 쓸고 북창하(北窓下)에 누엇시니
눈 압해 태공(太空) 행운(行雲)이 오락가락 하놋다

셋째 수다. 소박한 음식, 보리밥과 생나물을 양에 맞춰 먹은 후 초가집을 다시 쓸고 북쪽 창 아래 누었으니 높고 넓은 눈앞의 하늘에 구름이 오고가고 하는구나. 자연과 더불어 한가롭게 사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권구는 흉년이 들자 향리의 사창(社倉)을 열어 빈민을 구제했으며, 향약을 실시해 고을에 미풍양풍을 일으키는 등 풍속 교화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유학자이기도 하다.

공산리(空山裏) 저 가난 달에 혼자 우난 저 두견아
낙화(落花) 광풍(狂風)에 어나 가지 의지하리
백조(百鳥)야 한(限)하지 말라 내곳 설워 하노라

넷째 수다. 빈 산 속으로 지는 달을 보며 홀로 우는 저 두견새야. 심한 바람에 꽃잎이 지니 어느 가지를 의지해야 하나. 수많은 갖가지 새들아, 한탄하지 말라. 내 또한 너와 함께 서러워하노라.

낙화광풍은 혼탁한 현실을 말한다. 백조야, 나도 탄식하고 있는 너와 동병상련이다. 한가롭게 살면서도 세태에 대한 풍자와 비판도 함께 드러내고 있다. 안분자족을 노래하면서도 혼탁한 정치 현실을 염려하고 있는 지은이의 유학자다운 모습이 나타나 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영남에 파견된 안무사 박사수는 권구가 이인좌의 역모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 해서 그를 조사하기 위해 서울로 압송했다. 그러나 영조는 오히려 권구의 인품에 감동을 받아 특지로 권구를 석방시켰다. 이인좌의 난은 당시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 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권구는 경학·예설 등을 깊이 연구했으며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했고, 천문·역학 등에도 매우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속세를 떠난 사람도 세상과 등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 안분낙도의 삶은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이상향일지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사는 다를 게 없어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우리 삶의 화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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