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학에 종사하면서 많은 이들로부터 받는 질문이 있다. 시신을 보는 것이 무섭지는 않은지가 단연 첫째다. 그 다음은 생업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가장들이 숱하게 듣는 '얼마나 버느냐'다. 그 중 법의학에 호기심이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간혹 시신에 칼을 대면 피가 나오는지, 부검이 이뤄지는 부검실은 어떻게 생겼는지를 묻기도 한다. 본 편에서는 그 질문들 중 우리나라 부검실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1. 숙원, 무균 부검실
 
2018년 11월 2일은 한국 법의학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매우 의미있는 날이다. 클래스3 수준의 최신 무균 부검실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장장 5년여 간 기획과 설계, 시공을 거쳐 드디어 우리나라도 최첨단 부검실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의 부검실로는 중동호흡기증후군, 에이즈 같은 감염성 질환으로 사망하는 시신을 부검할 수 없었다. 특히 부검종사자를 감염에서 보호할 수 없는 한계가 뚜렷했다. 그런 의미에서 무균 부검실의 존재는 법의학은 물론 의학 발전, 각종 죽음을 조건에 관계없이 항상 부검하는 토대를 마련한 쾌거다.
 
지난 2일 강원도 원주에 문을 연 최첨단 부검실.

사실 우리나라 부검실은 한국 현대사만큼 다이내믹한 변화를 겪었다. 필자가 처음 대학수련의 생활을 하던 시절 부검실은 종합병원 개원 허가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그러나 부검실이 설치됐어도 개원 후 공간이 협소해지면 창고나 다른 용도로 변경되기 일쑤였다. 병원 유지에 필요해 어쩔 수 없이 보존하는 경우에는 지하실이나 아주 구석진 곳에서 간신히 체면치레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런 걸 공교롭다 하는 걸까. 무균 부검실이 개관한 11월 2일을 거슬러 올라가 정확히 27년 전, 1991년 11월 2일은 필자와 국과수의 운명적 동행이 시작된 날이다. 당시 서울 신월동 부검실은 1989년 지어진 건물이었는데 본관과 지하로 연결된 별관에 있었다. 1990년 이전만 해도 국과수 부검실이 없었으니 장소야 어디가 됐든 있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2. 설움, 떠돌이 법의관

부검실이 없을 땐 어떻게 부검을 했을까. 돌이켜 보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옛날 부검 환경은 형편없었다. 선배 법의관들은 법의조사요원과 구급차 형태로 개조된 봉고 차량을 타고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을 전전하며 부검을 했다. 영안시설도 지금과는 달라서 주로 외진 지하실 한켠에 있을 때다. 조명도, 환기 시설도 없는 곳이 태반이었고 방사선 검사는 딴 나라 얘기였다. 사용한 도구도 수돗물에 세척했고 한 곳 마치면 곧장 다른 영안실로 이동, 또 부검을 하는 그야말로 후진적 상황의 연속이었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 새 부검실이 만들어졌다. 어떤 면에선 지나온 과거보다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있지만 국회 등에서 온갖 문제들이 쏟아진 후 급하게 지은 탓에 열악한 건 마찬가지였다. 공간은 비좁고 부검대는 두 대가 전부였다. 짝 맞추기라도 한 듯 환풍기도 두 대. 타일로 된 바닥은 미끄러웠고 모든 문은 외부와 직접 통해 찬바람은 그대로 실내에 들어왔다. 한 겨울은 그야말로 전쟁과 같은 난리통이었다. 여름도 힘들긴 매한가지다. 폭염 이는 여름 날 바닥에서 물이 올라와 질퍽이기도 하고 시신이 부패하면서 내뿜는 냄새에 건물 전체로 퍼진 고약한 악취 때문에 업무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더위가 떠난 흔적 이어받은 겨울 맹추위라도 불어 닥치는 날엔 부검을 집도하는 내내 손이 시려 손가락을 채 움직이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서중석 소장이 서울 국과수 법의학부장을 지낼 당시 부검실에서 언론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3. 한계, 위안 아닌 위안

부검실은 시대와 함께 흔적을 달리해왔다. 사회 발전 양상이 큰 역할을 했으나 점차 부검수요가 늘었고 특히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각종 재해 발생 시 부검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인지를 크게 각인시켰다.

필자도 제대로 된 기능과 역할을 하는 부검실을 꿈꾸며 큰 욕심을 냈다. 예산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1997년, 비로소 무균 부검실을 증축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당시만 하더라도 부검실에 대한 우리 사회와 건축전문가들의 이해가 전무했고 주변 민원이 계속된 탓에 제한된 공간을 활용한 증축을 해야 했지만 이만해도 큰 성과였다.

결국 우리 스스로 파고를 넘어야 했다. 모든 직원이 함께 토론을 거듭했다. 부검이 끝나면 가상 시설을 염두에 둔 채 실제 시신을 운반하는 카트를 움직여 보는 등 최적화 된 부검실을 고민했다. 그러나 꿈은 이뤄질 수 없기에 꿈이라고 했다. 목적 달성에서 좌절을 맛본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부검실에 대한 설계나 건축을 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기술이 부족했다. 실내 음압 유지 시설을 작동시키는 날은 특히 한계를 절감하는 날이었다. 건물 전체를 덮친 소음은 물론 음압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고된 생활 끝에 3대의 부검대를 추가 설치했는데 부검이 많은 날에만 사용하기로 했으나 나름의 위안이었다.

#4. 악취와 반전

필자가 지방근무를 마치고 다시 본원으로 돌아왔을 때의 기억이다. 국과수 뒤편 비탈 언덕에 300세대를 수용하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동안 부검실의 악취는 그곳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입주자들이 아파트에 속속 들어오자 민원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국과수로 들어온 영구차에서 시신을 내리고 싣는 모습을 그래도 목도하던 터였다. 특히 자녀를 가진 학부모 입주민들의 고민이 컸을 거다. 정서적으로 문제가 되진 않을까하는 걱정에서인데 혹자는 부검실 폐쇄를 주장하기도 했을 정도다.

국정감사 기간. 민원이 계속되자 상임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실상 파악을 이유로 부검실을 찾았다. 고도로 부패된 시신을 부검하는 중에 국과수 건물 본관은 물론 주변 건물에 심한 악취가 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본 의원들도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예산 작업이 수월하게 마무리됐다. 누군가는 연출한 것 아니냐는 의심 어린 시선을 던지기도 했으나 결코 아니다. 우리는 우스갯소리지만 이렇게 말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우릴 도와준 것이라고.

#5. 다시, 새롭게

억울한 영혼이 던진 도움의 손길로 2007년 국과수 리모델링이 이뤄졌다. 당시 국과수는 법적으로 증·개축이 금지돼 있었다. 그래서 부검실의 모든 겉벽만 남기고 내부를 헐어냈다. 빈 공간에는 최신 음압환기시설을 갖춘 부검실로 재탄생시켰다. 물론 공사기간 중 다른 장소를 임대해 부검은 이어나갔다. 그토록 바랐던 부검실이 현실이 된 순간이다.

부패 시신을 부검하는 격리부검실 2곳을 포함, 8대의 부검대, 혈관조형술 장치, MDCT, CCTV, 현장상황 점검 영상재생 장비 등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아시아 최정상의 부검실이었다. 그때부터 부검종사자들이 부검실에 입장하기 전 선진국과 같이 완전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보호 장구를 착용하는 등 최소한의 배려를 갖추는 문화가 형성됐다. 양복을 입은 채 덧가운 입고 구두 신은 상태로 부검했던 시절이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6. 원주, 새로운 희망

2013년 11월 국과수는 원주로 본원을 이전했다. 필자가 국과수 원장에 취임한 2012년 7월, 완공을 눈앞에 둔 신축건물 확인을 위해 공사현장을 방문했을 때다. 현재 국과수 본관 내에 서울 국과수보다 기능이 떨어지는 부검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막아야했다. 그래서 필자는 그때 부검에 부족함 많은 공간이 본관에 들어서는 걸 막기 위해 당분간 부검을 문막에 있는 옛 원주 분소 부검실에서 할 것을 제안했다. 이전하기 전부터 행정안전부와 기획재정부를 부단히 설득하고 새로운 예산을 수립, 설계를 진행했다. 지금 국과수 후배들이 지난 2일 우리의 최종 목표였던 클래스3 부검실을 완성하게 된 첫 단추였던 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후배들에게 큰 짐을 지우고 은퇴한 것이 새삼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 때의 판단에 후회는 없다. 법의학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만들어 낸 결과를 그대로 수용했다면 지금 원주 본원은 시신 냄새, 오염된 공기로 최악의 근무환경이 됐을 것이 자명하다.

새로운 부검실의 완공을 보면서 필자는 두 가지를 소원한다. 법의학 종사자들에게 첨단 시설이 국민 인권을 위해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의의 공간으로 이용됐으면 좋겠다. 국가적으로 볼 때 세계에서 몇 되지 않는 부검실 건축기법 노하우를 다방면으로 수출,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창출해주고 그 경제적 이익을 국민에게 다시 돌려 줄 수 있었으면 한다.  
 

◆서중석 소장은
-1957년 1월 3일 전남 여수 출생
-서울 양정고, 중앙대 의과대학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 취득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중부분소장·법의학부장·원장 (1991년부터 2016년까지 25년 재직)
-연세대·고려대·경찰대 외래교수, 대한법의학회·아시아법과학회 회장, 세계과학수사학술대전(WFF) 의장 등 역임
-대전보건대 14대 총장
-금강일보 제2기 독자권익위원회 위원장(現)
-수상: ‘유한의학상’, ‘서울시의사회 의학상’, ‘외교통상부장관상’, ‘대통령 표창’(과학수사대상), ‘홍조근정 훈장’, ‘몽골정부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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