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수십년 전 아버지는 스승님이 정년 퇴임 하시던 모습을 지켜보면서 결심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학교말곤 가본 적도 없을 만큼 연구실을 사랑하셨던 본인의 스승님이 퇴임하시고 그 곳을 신임교수에게 비워줘야 했습니다.
그 수많은 책을 빼면서 아버지는 맘이 안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애지중지하던 은사님의 평생 업적을 옮길 곳이 없어 박스에 담은 채 좁은 방안에 쌓아둬야 했습니다. 박스가 너무 많아 방문 닫기도 어려웠고 그 상태라면 노인이 상자를 내려 꺼내보긴 불가능할 것 같았답니다.

‘그걸 언제 본다고 그냥 버리지 노인네가 차곡차곡 싸가지고 가시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는 정년 전에 이 애증의 책을 모두 처분하고 훌훌 빈몸으로 나서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드디어 정년이 임박했다는 걸 어렴풋 느끼고 아버지는 책을 정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니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이건 희귀본이고, 이건 외국에서 사온책이고, 이건 북한책이고. 중하지 않은 책은 일절 없었지요. 그래도 인문학을 사랑하는 좁고 깊은 사람들이 많으니 아깝다 생각않고 깔끔하게 기증하기로 결심하셨답니다.

큰맘먹고 도서관에 전화해 ‘나는 누구고, 이러한 연유로, 이러저러한 희귀하고 귀한 책을 기증하기로 했다’고 말하니 도서관에서는 “마음은 감사한데 관리인원과 장소가 부족해 기증 못 받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답니다.

챙겨가야겠구나 생각하니 가져가서 보관할 장소도 없다했습니다. 인문학 교수가 무슨 돈이 있어 넓은 서재 딸린 집이 있겠습니까. 이 고민 저 고민하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책 있으면 가져가라고 했다네요. 공부하는 사람들은 책 욕심이 많으니 부지런한 제자가 먼저 가져가겠구나 싶었답니다. 그런데 몇 사람 찾아오지 않더랍니다. 이러다 시간만 끌 것 같아서 중고서점에 판매라도 해야겠다 결단하시고 청계천에 전화를 했다네요.

그렇게 다섯 명의 인부와 두 대의 트럭이 와서 반나절 작업하고 실어갔는데 책이 너무 많아서 트럭과 사람을 더 불러야 했답니다. 나간 책은 없고 들여온 책만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된 작업으로 트럭 비용, 인부 비용까지 아버지가 내야했습니다. 비용을 다 치르고 나니 손에는 20만 원이 쥐어 있었답니다. 책을 실은 차가 떠나가는 걸 바라보다가 함박눈이 어찌나 많이 쏟아지는지.

그런데 갑자기 함박눈보다 더 큰 눈물 방울이 고목같은 아버지 눈에서 뚝뚝 떨어져 한참 놀랐다고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구겨진 봉투의 20만 원을 만지작 거리며 ‘내가 겨우 평생에 걸쳐 20만 원어치 성과를 이뤄냈구나’ 생각하니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고 하셨습니다.

“울지마세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뜻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저의 삶 속에서 또 살아가고 계신겁니다. 존경합니다. 나의 스승님.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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