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행동에는 반드시 과(果)가 따른다

자신이 한 행동에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과(果)가 따른다. 남에게 은덕을 베풀면 복의 과(果)가 따르고 원수와 원한을 지으면 화의 과(果)가 따르는 것이 하늘의 섭리라 하겠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풀을 엮어서 은혜를 갚았다는 결초보은의 스토리를 보면, 중국춘추시대 진나라의 ‘위무자’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죽자 자기 아버지의 첩을 순장시키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개가시켜주었다. 세월이 지나 전쟁이 일어나자 위무자가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위무자가 적장에게 쫓기고 있던 중 뒤쫓아 오던 적장의 말이 풀밭에 엮여져 있던 풀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적장이 말에서 떨어져 죽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위무자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위무자의 꿈에 그 첩의 아버지가 나타나 ‘그대가 내 딸을 살려주었기에 그 은혜를 갚고자 내가 그 풀밭에 풀을 엮어 논 것이오.’라고 하였다는 스토리다.

그래서 결초보은은 죽어서까지 그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다. 경행록에 보면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어라. 사람이 어디서 산들 서로 만나지 않으랴(恩義를 廣施하라. 人生何處不相逢이랴)' 하였다.

이번에는 반대의 예를 들어보겠다. 구한말 탁지부 대신을 지낸 어윤중은 집권시절 남의 조상의 묘 터가 명당이란 말을 듣고 권세를 남용하여 강제로 빼앗아 자신의 조상 묘를 써서 큰 원한을 산 일이 있다.

그 후 어윤중은 정변으로 실각(失脚)해 고향으로 도망 오다가 조상 묘를 빼앗긴 사람들로부터 용인에서 참혹하게 몽둥이로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다.

경행록에 보면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마라. 길이 좁은 곳에서 만나면 피하기 어려우니라.(讐怨을 莫結하라, 路逢狹處면 難回避니라)' 하였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남에게 은혜와 의리를 베풀었든 원수와 원한을 맺었든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한 과(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와 의리를 베푸는 것은 앞길에 융단을 펴는 것이요, 원수와 원한을 맺는 것은 앞길에 가시나무를 심는 것이라 하였다.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 은혜와 의리를 베풀어서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함이지만 원수와 원한을 맺어서 그 원한의 살(煞)을 맞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윤중 사건처럼 원한의 살(煞)은 언젠가는 무서운 앙갚음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척짓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이다.

▲ 악업은 소멸시키고 선업을 쌓아라

불교에서는 자신이 지은 업(業)에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보(報)가 따른다 했다.

이것을 업보(業報) 즉 카르마(Karman)라고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지은 선업이나 악업에 따라서 받게 되는 즐거움이나 고통을 말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에 의해 그에 걸맞은 보(報)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대신 할 수도 없는 자기가 받아야 할 몫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현생 삶의 모습은 바로 전생의 삶 즉 전생의 업에 의함이라 한다. 만약 착하게 그리고 열심히 사는 데도 그 삶이 힘들고 고달프면 이는 전생에서 지은 업 때문이라서 현생의 삶에서 열심히 전생에서 지은 업을 소멸시키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로써 그 업을 소멸시키면 악업이 없어져 그 후는 행복한 삶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고통이 찾아오게 되면 좌절하거나 원망의 마음을 갖기 쉽다. 이럴 때 이러한 불교교리를 떠올려서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희망과 용기로 삼아봄이 어떨까 한다.

이와 반대로 나의 현생 삶이 부귀하게 되면 자칫 교만으로서 남에게 원성을 사서 악업을 짓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음 생에는 악업을 가지고 가게 되고 다음 생에는 그 악업을 소멸하기 위해 고통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불교의 교리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남보다 부귀를 누리며 살고 있다고 하면 겸손한 삶, 베푸는 삶으로 선업을 쌓아 그 선업으로써 축복받는 다음 생을 기약함이 어떨까 한다.

▲ 그렇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의 업(業)이 보(報)가 되어 나에게로 돌아옴이 아니겠는가. <대전시민대학 인문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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