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는 죽음은 늘 아리게 다가온다. 사회의 수많은 죽음을 접할 때마다 초연할 수 없는 건 우리 스스로도 그 앞에선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인데 법의학과 인생을 함께하면서 안타까운 죽음을 여럿 접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를 초연하게 바라볼 수 없다. 법의관의 운명은 그 앞에서 초연해야만 한다. 그래야 망자의 죽음 아래 숨겨진 진실을 마주할 수 있어서다. 법의학 속 내 삶의 기억을 더듬어 그 이유를 찾아보려 한다.

#1. 사라진 여성의 싸인(Sign)

1990년대 후반 장마가 한창일 때 얘기다. 필자는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부검 의뢰를 받았다. 40대 여성 변사사건이었다. 혼자 살면서 인삼찻집을 운영하던 변사자는 며칠 동안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계속 닫힌 찻집이 의아하기도 하고 늘 보이던 사람마저 보이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주변 지인들이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결국 찻집 문을 강제로 개방해야 했다. 열쇠 수리공의 도움을 받아 내부로 들어가니 이미 여성은 숨진 채였고 시신 역시 심하게 부패하고 있는 상태였다. 현장 상황도 열악했다. 높은 습기와 고온이 계속되면서 시신의 부패를 가속화시켰다.

#2. 타살이 아닌 이유

변사자는 배에 자창(칼에 찔린 상처)이 있었다. 현장 바닥에는 많은 피가 고여 있었고 탁자 위엔 술병이 쓰러진 채 나뒹굴었다. 타살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수사관들은 서둘러 부검을 의뢰했다.

시신의 부패가 걱정되긴 했으나 다행히 복부의 자창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시신과 함께 썩어가던 의복은 부풀어 오른 배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고 무엇보다 왼쪽 손목 부위에 평행하게 형성된 4개의 절창(베인 상처)이 관찰됐다. 그런데 타살로 보기엔 어려움이 있겠다 싶었다. 현장의 피는 자유낙하에 의한 혈흔들로 보였고 최초 손상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칼에선 변사자와 같은 혈액형이 검출됐다. 변사자의 사인이 타살이 아니라 자살에 합당하다 판단되는 까닭이었다.

#3. 뜻밖의 재회

사건을 의뢰한 수사관은 필자와 아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해당 경찰서 관할 지역에서 발생한 변사사건 부검 의뢰를 도맡아서 처리하던 인물이었다. 감정서 작성을 신속하게 해주는 필자를 특히 좋아한 그가 부검 의뢰를 하러 올 때마다 음료수를 꼭 한 병만 가져와 주머니에 넣어 주곤 할 정도로 사이가 각별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법의관 선생님들 모두에게 짜장면 한 그릇 사드리겠다.” 농담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필자와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 수사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다녀간 이틀 뒤 사무실에서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세상과 작별했다. 차가운 카트에 누운 채 음료수도 건네지 않고 뻣뻣하게 굳은 그와 필자는 그렇게 부검실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사후 근육 변화로 얼굴 형태가 다소 변했지만 워낙 허물없이 지냈던 분이라 필자는 그를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부검 내내 마음은 매우 무거웠다. 가슴 한켠이 휑한 느낌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바로 2~3일 전에도 얼굴을 마주했기에 그런 마음이 특히나 더했다.

부검 결과, 수사관의 사인은 심근경색증이었다. 몇 달 후 그 기억이 간신히 잊힐 무렵 그 수사관의 과로사 여부를 질의하는 문서가 배달됐다. 필자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의견서를 작성하면서 까닭모를 답답함과 함께 아린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 당시 많은 동료 법의관들이 낮은 보수와 과중한 업무를 견디지 못하고 국과수를 떠났다. 우리는 보직자를 포함한 4명의 법의관만 남아서 우리나라 부검을 도맡아 처리하는 아주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상심은 더 크게 다가왔다.

#4. 2015년, 중국에서의 비보

2015년 7월,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에 있는 조선족 마을 부근 다리에서 지방행정연수원 중견관리자과정 연수 중이던 우리나라 공무원 26명 등 28명을 태운 버스가 하천으로 추락했다. 중국인 운전사를 포함, 11명이 숨졌다. 이들은 교육과정 일환으로 중국 일원에 펼쳐있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방문하고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 유적지로 향하던 중 급커브 길을 달리던 버스가 추락하면서 사고를 당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행정자치부는 차관 및 지방행정연수원장 등을 현지에 급파, 사건 수습에 나섰다.

중국은 외국인이 자국 영토에서 사망하면 부검을 실시하고 화장해 시신을 인도해왔다. 중국 공안은 본 사건의 엄중성을 고려, 이 절차에 준용해 부검한 후 행정적 처리를 할 것으로 예상됐고 그 시간도 상당하게 걸릴 것으로 보였다. 개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확인해보니 필자의 예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행자부에 신속하게 설명됐고 회의 끝에 가능하면 빨리 시신을 고국으로 인도해 오기 위해 국과수에 법의관 파견을 정식 요청했다.

서중석 에스제이에스법의학연구소장이 201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 재임 당시 한국 공무원 버스 추락사고 시신 수습과 검안을 위해 인천국제공항에서 중국으로 출국하고 있다.

#5. 아수라장, 다시 현장으로

2014년 국과수는 아시아 법과학학회와 세계 법과학학회를 동시 개최하는 월드 포렌식 페스티벌(World forensic festival)을 서울에서 개최했다. 당시 많은 중국 법과학자들이 한국을 찾아 이미 그들과 수년 전부터 아주 긴밀하고 좋은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 등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동료 법의관들은 필자가 중국 법의학자들과의 두터운 친분을 이용, 우리나라 관습을 잘 설명해 사태를 원활히 수습할 것이라 생각해서 직접 중국으로 가 볼 것을 제안했다.

사실 당시 백내장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탓에 안정이 긴요했던 상태였지만 국가적 대사(大事) 앞에서 좌고우면(左顧右眄) 할 수 없어 현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가는 길 자체가 막막했다. 비행기 좌석이 없어 중국 장춘으로 우회했고 공항 도착 후 8시간이상 차를 타고서야 겨우 현지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은 많은 유가족들과 취재진들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현지에선 행자부 차관을 중심으로 사고대책반이 꾸려져 상황 수습에 정신이 없었다. 희생자들은 대개 50대였다. 30여 년 만에 승진해 연수를 받게 돼 기뻐했던 안타까운 사연들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필자는 공안 담당자들과 협의해 신속하게 재 검안을 시작했다. 크게 손상 받은 시신은 복원했고 우리나라 장례 문화의 특성과 부검의 불필요성을 설명했다. 이때 중국 법의학자들의 숨은 조력에 힘입어 다행히 부검은 하지 않기로 했다. 또 지안에는 방부 처리하는 기관이 없어 긴급히 북경에서 전문가를 초빙, 고국으로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정부 관계자들의 고된 생활이 눈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회의와 업무처리의 강행군 속, 그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5. 또 다른 슬픔

장례 절차를 앞두고 자정을 넘긴 대책회의가 계속됐다. 필자와 법의조사관들은 입국용 최종 검안서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에 회의 중간 숙소로 이동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쪽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들겨 나가보니 조금 전까지 함께 회의를 하던 최두영 지방행정연수원장이 우리가 투숙한 호텔 지상 주차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비보를 접했다.

필자는 급히 병원으로 가서 검안을 실시한 후 손상부위를 정리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필자가 국과수 원장으로 발령받을 때 행자부 기획관리실장이었다. 행자부 살림살이는 물론 기획 분야를 총괄했었고 그 후 지방행정연수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행자부는 매달 확대간부회의를 했는데 그는 필자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국과수 운영에 대해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던 인물이었다. 성품도 온화하고 원만해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행정가이기도 했다. 바로 몇 십분 전까지만 해도 마주보고 회의했던 분을 검안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은 아직 채 낫지 않은 눈의 통증만큼이나 가슴 아리게 다가왔다.

그날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채 중국 당국 설득에 전력했다. 최 원장은 고위공무원일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잘못된 여러 의혹이 제기돼 부검설이 나오기도 했으나 CCTV 등 증거를 중심으로 자살이 확실하니 부검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문했다. 필자는 몸이 너무 피곤하기도 했지만 이런 일들이 마치 내 스스로에게 직접 일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특히 그가 머물었던 객실 내부 탁자 위 물음표(?)가 쓰여진 메모지를 보면서 최 원장이 교육생들을 잃은 데 대한 안타까움과 정부, 중국 당국, 유족 사이에서의 압박감이 가중되자 이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검하지 않은 최 원장의 시신은 고국으로 운구돼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부인과 두 아들 등 유족, 행자부 직원들의 애도 속에 우리와 영원히 작별했다. 이 고통은 국과수 25년 법의관 생활 중 가장 마음에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6. 더 이상의 아픔만은…

법의관의 운명은 그러하다. 경우에 따라선 함께 일하던 동료 혹은 지인을 검안하거나 부검해야 한다. 의료인들 사이 가족이나 가까운 분을 수술하지 않는 불문율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법의현장에서 적은 인력 풀로 인해 사랑하는 분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늘 기도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제 저에게 더 이상의 아픔을 주시지 마십시오.”
 

◆ 서중석 소장은
-1957년 1월 3일 전남 여수 출생
-서울 양정고, 중앙대 의과대학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 취득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중부분소장·법의학부장·원장 (1991년부터 2016년까지 25년 재직)
-연세대·고려대·경찰대 외래교수, 대한법의학회·아시아법과학회 회장, 세계과학수사학술대전(WFF) 의장 등 역임
-대전보건대 14대 총장
-금강일보 제2기 독자권익위원회 위원장(現)
-수상: ‘유한의학상’, ‘서울시의사회 의학상’, ‘외교통상부장관상’, ‘대통령 표창’(과학수사대상), ‘홍조근정 훈장’, ‘몽골정부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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