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성·고유성으로 인정받는 문화재
잇단 전란 속 도공유출로 명맥 끊겨

민족의 명산 계룡산 줄기가 휘감고 있는 한적한 충남 공주의 한 시골마을에서는 지금도 분청사기를 굽는 도공들의 바쁜 손놀림을 볼 수 있다. 바로 강진 청자, 광주 철화백자와 더불어 한국의 3대 도자기인 계룡산 분청사기의 고향 학봉리다.
조선초기인 14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등장한 분청사기는 전국적으로 유행됐다. 특히, 15세기부터 16세기 전반까지 생산된 계룡산 분청사기는 타 지역 분청사기와는 확연히 구분가는 독특한 문화재다.
계룡산의 흙은 거칠고 높은 철분함량을 자랑하는 회흑색의 태토(胎土)다. 때문에 계룡산 분청사기는 고유한 색과 질감으로 탄생됐다. 또한 도공들은 막걸리색의 분장토를 귀얄법으로 분장시켰다. 귀얄법은 짐승의 털, 풀같은 재료로 만든 작은 빗으로 빗질하듯 색칠하는 한국의 고유 기법이다.
계룡산 분청사기의 가장 큰 특징은 철가루를 물에 탄 철화(鐵貨)를 그림안료로 사용한 것이다. 영·호남 분청사기들이 도장으로 문장을 찍는 인화법, 표면을 긁어내어 문양을 만드는 박지법,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조화법 등을 사용하는 데 반해 계룡산 분청사기는 붓을 이용하여 자유분방한 그림을 나타내는 철화분청사기라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분청사기 문양의 공통적인 특징이 활달하고 운동감이 충만한 것이라면 계룡산 철화분청은 선이 굵고 힘 있는 필력으로 독특한 특징을 만들어내고 있다.

해와 달에서부터 물고기와 새, 나무와 짐승, 갖은 초화등 생활환경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림소재가 된다. 이들 무늬는 형태를 알 수 있는 내용도 있으나 빠르고 능숙한 솜씨로 변형시켜 표현한 무늬는 현대인의 미감에도 잘 어울리는 추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처럼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꽃피웠던 계룡산 분청사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서서히 사라졌다. 특히,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수많은 조선도공들이 일본으로 납치된 것이 직격탄이었다. 분청사기로 명성 높은 계룡산 학봉리도 그 영향을 받았다. 몇 명의 학봉리 도공들이 일본으로 납치됐는지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학봉리 출신 조선인 이삼평이 일본의 도자기 명소인 큐슈 아리타의 한 신사에 모셔진 것을 보면 학봉리도 그 여파를 피하지 못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1990년 이삼평의 후손들이 그의 고향 공주 학봉리를 찾아 이삼평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니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 도자기 산업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란을 거치며 계룡산 분청사기의 명맥이 잠시 끊겼지만 현재 계룡산에는 약 1만 8200㎡의 장소에 11개의 공방이 운영되고 있다. 이 곳에서 도공들은 분청사기의 역사를 이어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공주시는 계룡산 분청사기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알리기 위해 2004년부터 매년 4월 계룡산 분청사기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김경훈 인턴기자 admin@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