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고효율·고위험의 해양운송
'조운선단 저승사자' 태안 안흥량
안전항로 만들기위한 운하건설
10여회 시도, 결국 실패로 남아

충청·전라·경상도 즉 삼남은 전 국토의 7할이 산간지역인 한반도에서 드물게 경쟁력 있는 평야의 땅이다. 풍요로운 삼남의 땅에서 수확한 세곡은 근 1000년간 이 땅을 유지시킨 원동력 중 하나였다. 고려·조선조정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 삼남의 세곡을 안전하게 운송하는 것이었다.
세곡을 개성 혹은 한양으로 운송시키는 방법은 육로운송과 해양운송 뿐이었다. 그러나 육로운송은 당시의 미비한 운송기술과 도로사정으로 인해 매우 비효율적이었기에 고려·조선은 조운선단을 활용한 해양운송을 선택했다.
조운선단을 운용할 시 조운선 한 척당 약 20명이 평균 52.9t을 운송했다고 하니 그 효율성이 대단하다. 하지만 해양운송은 당시의 항해기술로는 큰 위험성이 있었다. 특히 ‘안흥량’ 지금의 태안 앞바다는 당시 험난하기로 전국 제일이었고 조운선단이 가장 무서워했던 악로(惡路)였다.
실제 태종에서 세조 때까지 60년간 충남 태안연안에서 일어난 사고는 파선 및 침몰된 선박 200척, 사망 1200여 명, 미곡 손실 1만 5800석이었다.
이처럼 막대한 피해를 입어온 고려·조선은 조세 운송피해를 막고자 부단한 노력을 지속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태안읍 인평리에서 서산시 팔봉면을 가로지르는 한반도 유일한 운하 유적지 굴포운하다.
굴포운하는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기 위한 운하 유적으로 총 7km 중 4km만 개착되고 완공되지 못 한 비운의 유적지다. 고려 숙종(1096년~1105년) 때 처음 논의됐으나 기록에 남은 개착시도는 인종12년(1134년) 7월 고려조정이 정습명(畋襲明)을 태안으로 파견하면서다. 그는 인근지역의 인력 수천 명을 동원해 4km를 파냈지만 3km를 남긴 채 실패했다. 단단한 암반층과 조수간만의 차와 같은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이후 골포운하는 공양왕3년(1193년) 왕강(王康)의 건의에 따라 재착공 된다. 그러나 마찬가지 이유로 실패한다.
고려의 굴포운하 완공시도는 조선대로 이어졌다. 태조4년(1395년) 굴포운하 재착공은 경상도 조운선 16척 난파를 계기로 다시 재개됐다. 태조는 개국공신 남은(南誾)과 최유경(狟有慶)을 현지로 파견했고 이들은 사안을 검토하던 중 고려와 같은 이유로 공사를 중지했다.
이후 태종12년(1412년) 하륜(河狢)의 건의로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관류식(瓱流式)과 달리 수문으로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는 갑문식(畡門式)형태로 기술적 장애물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운하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의 규모가 작아 작은 배 한 척만이 겨우 통과 가능했다.
또한 그 운행일수가 적고 큰 배에서 작은 배로 세곡을 몇 차례 옮겨 실어야했기에 갑문식으로는 정상적인 세곡운송의 기능을 다할 수 없었다.
이후 태종은 태안지역을 2회나 순방하는 등 굴포운하 건설에 고심을 했고, 현종 때도 다시 시도 되는 등 고려-조선 535년간 약 10여회의 시도 끝에 굴포운하 사업은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만약 고려·조선이 굴포운하 준공에 성공했다면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수에즈운하(1869년 개통),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운하(1914년 개통)보다 수백 년 앞선 대규모 운하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을지 모른다.
현재 유적지로 남아 있는 지역은 평균적으로 운하 밑바닥의 넓이는 약 19m고 상층부의 넓이는 52m며, 높이는 제일 낮은 곳이 3m고 제일 높은 곳은 50m다.
하지만 기록과 현장의 흔적으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 문화재로 신청되지 않아 굴포운하 대부분은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상태이다. 이 곳에 쏟아진 500년의 노력을 생각하면 논·밭이나 작은 저수지로 변해버린 현실이 참담하다.
김경훈 인턴기자 admin@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