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밭골 대전(大田), ‘큰 밭’이 있는 곳이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대전은 명산의 땅이다. 계룡산, 식장산, 보문산, 장태산등 전국의 등산인들이 탐내는 명산들이 즐비해있다. 이 산들은 대전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다. 대전 둘레산길을 걷다보면 역사 속에서 이 땅을 수호했던 무수한 산성을 만나게 된다.
▲계족산성
국가사적 제35호 계족산성은 계족산 정상부에서 북동쪽으로 길게 발달된 능선을 따라 약 1.3km 지점에 있는 봉우리(해발431m)위에 축조됐다. 대전에서 규모가 가장 큰 테미식 석축산성으로 그 둘레가 1037m에 이른다.
성의 축조 방식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 매우 견고하게 축조됐다. 그 중 하나는 자연석을 이용한 내탁법으로, 서벽, 동벽부분이 해당된다. 또 하나의 방식은 성벽 내·외를 모두 돌로 쌓는 협축법으로 동벽 및 북벽, 서벽과 남벽 일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가 건설한 계족산성에서는 백제유물 뿐만 아니라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이 발견돼 백제멸망 후에도 계속 운용된 산성임이 증명됐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북쪽 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해 사용하는 등 계족산성을 중요한 거점으로 여겼다.
이처럼 중요거점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던 계족산성은 백제 민초들의 넋이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이 곳에서 백제 부흥운동을 진행했던 백제 민초들에게 김유신 장군은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부귀를 기약하라"고 전했지만 백제 부흥군은 "싸우다 죽일지언정 신라군에게는 항복하지 않겠다"고 하여 임전의지를 다졌고 항전 끝에 수천 명이 전사한 곳이기 때문이다.

▲질현산성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8호인 질현산성은 질티재 북쪽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테미식 석축산성으로 성둘레는 800m이며 내탁법을 기본으로 하나 일부 성벽은 협축법을 사용했다. 성벽을 쌓은 돌은 모서리를 가공한 네모난 돌로 면을 맞춰 아래에서부터 조금씩 안으로 들여쌓으면서 군데군데 조그만 돌로서 쐐기를 박은 흔적도 볼 수 있다. 현재 북쪽의 성벽이 가장 잘 보존돼 있다.
또한, 질현산성 내부에는 현재도 음용이 가능한 샘물이 나오고 있으며, 이 샘물이 흘러 성 밖으로 나가는 수구(水口)로 추정이 되는 시설이 남문 터에서 볼 수 있다. 토기조각 유물로 유추 할 때 조선말엽까지 운용해온 산성으로 추정된다.
길현산성 또한 계족산성을 중심으로 발생한 대전지역 백제부흥운동의 전초지 역할을 한 성으로 이 곳 또한 백제 유민의 아픔과 슬픔이 남아 있다.
▲월평산성
대전 서구 월평동 갑천 동안의 해발 138m 구릉 정상에 위치한 월평산성은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 됐다. 산성에서는 서쪽으로 유성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대전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산성의 주요임무는 대전에서 공주로 이어지는 옛길을 방어하기 위함으로 추정이 된다. 대부분의 성벽은 붕괴됐으며 1994년 마지막 발굴조사 이 후 추가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성벽은 진흙과 작은 돌을 섞어 기초부를 만들었으며 그 위에 마사토와 사질토를 겹겹이 다져 조성했다. 외벽의 일부는 화강암을 정방형에 가깝게 다듬어 조성했다.
월평산성에서는 백제시대의 목책, 방어호, 목곽저장소, 석충성 등이 출토됐다. 또한, 고구려의 토기도 함께 출토 됐는데 이는 고구려가 5세기 후반경 대전지역까지 진출했던 당시 정세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주목받고 있다.

▲테미산성
매년 봄이면 대전 대흥동에 위치한 테미공원은 벚꽃을 보기 위한 시민들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 장소로 변모한다. 아는 사람은 극소수지만 ‘산성의 도시’ 대전답게 이 아름다운 테미공원에서도 백제산성의 잔해를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대전산성이 그러하듯 본래의 명칭은 알 수가 없다. 테미산성도 마찬가지로 산성이 위치한 테미고개의 이름을 빌려 사용하고 있다. 테미산성은 신라군이 공주·부여로 이동하는 길 중 최단거리에 위치해있으며, 산성에서 보문산성, 계족산성, 길치산성, 관산성, 탄현고개 등을 관찰가능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또한 백제시절 백제왕이 전쟁지휘를 위해 자주 자리를 했다고 해서 임금 뒤의 병풍이라는 뜻의 어병산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554년, 관산성 전투 때 백제의 성왕(492년 추정 ~ 554년)이 이곳에서 지휘를 하다 왕자인 부여창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현재 대청호의 진천지역에서 전사한 사실로 미뤄 볼 때 테미산은 백제의 전투 지휘소 역할을 한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테미산성은 일제강점기 시절 충남관청사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도관이 설치되며 산의 명칭도 수도산으로 변경되고 산성 또한 무분별하게 파괴됐다. 이 후 산성의 존재사실도 잊혀가는 현실이다.
‘구릉이 있는 곳에 산성이 있는 땅’ 대전에는 관리는커녕 아직도 확인조차 되지 않은 산성이 다수 존재한다. 대전시는 ‘2019년 대전방문의 해’를 맞아 대전에 숨겨진 삼국시대의 문화유산을 개발·관리하고 교육한다면 더욱더 성공적으로 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기적으로 산성을 보존·홍보한다면 대전이 ‘삼국시대 최대 격전지’ 중 한 지역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대전의 부족한 지역특색과 역사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김경훈 인턴기자=admin@ggilbo.com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