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일본인이 다니던 학교는 ‘소학교’라고 불리며 6년의 교육이 이뤄졌다. 그러나 조선인이 다니던 학교는 ‘보통학교’라 했고 4년의 교육만을 시켰다. 과목은 허드렛일을 시킬 수 있을 만큼의 언어와 숫자교육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주도로 만들어졌던 대전은 그 구분이 더욱 엄격했다. 중앙통에 있는 원동초등학교는 일본인을 위한 학교였기에 코앞에 학교를 두고서도 조선인은 멀리에 있던 보통학교에 걸어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이르면 ‘국민학교’라해서 조선과 일본인학교를 통합시켰다.

웬일인가 싶을 것이다. 이유는 잔인했다. 1930년 일본은 대동아전쟁을 시작했다. 그 전쟁에 나섰던 많은 일본 청년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 중에 죽으면 ‘천황의 신성함으로 야스쿠니신사에서 신이 된다’고 말했던 일본이지만 현실의 자식 잃은 슬픔까지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민심은 싸늘했고 전쟁에 대한 분노와 정부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

그러자 만든 것이 내선일체였다. 일본과 조선은 천황의 자손이라는 것이었다. 노예는 전쟁에 나갈 의무가 없다. 단지 주인만 안 물고 집만 지키면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일본은 총알받이가 필요했고 때아닌 국민교육을 이 땅에서 시작했다.

국민이면 받는 교육이 아니라 황국신민을 위한 심상교육이었다. 그렇게 일본인이 열어준 교육을 받으면 학도병으로, 그리고 위안부로 끌려나가야 했다. 황국신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어는 외국어의 일종으로 가르쳤을뿐 국어는 일본어였다.

그나마도 1941년 이후에는 가르치지도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일본식 성명(이름) 강요(창씨개명)를 받아야 했으며 조선어를 쓰면 매를 맞았다.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잃은 것은 우리의 혼이었다. 그래서 1996년부터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꿔 부른 것이다. 황국신민서사 시주를 세워두고 말 잘듣는 국민을 만들려 했다. 심지어 초등학교에서는 자갈돌에 써서 머리에 새기고 전시회를 열어 칭찬했다.

지금 한밭교육박물관은 입구에 황국신민서사 시주를 눕혀서 전시하고 있다. 옳은 전시였다. 남겨두되, 이렇게 우리의 방식으로 전시하는 수준높은 박물관이었다.

이렇게 알찬 줄 진정 난 몰랐었다. 알고보니 1992년 만들어 진 전국 최초의 교육박물관이었고 그 안에 들어있는 유물이 2만 7000점을 웃돌았다. 관심이 없으면 이렇게 모르는 것이었다. 1938년 만들어진 건물은 특이함이 없다.

창이 일장기를 상징하는 원형이라는것 말고는 특이하지 않다. 왜일까? 내가 어려서 다녔던 학교랑 똑같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까지 시설은 거의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까지 학교시설은 멈춰있었다.

잘 만들어진 빨간 벽돌 집(아까랭까)은 아직도 멋스럽다. 현관 포치가 있었던 것을 보니 분명 신경 쓴 건물이었다. 1990년대 학생수가 폭증했을 적에 급식실로 쓰겠다고 부수지 않은 것은 박물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근대 건축물이 이렇게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

건강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근대건축물은 한밭교육박물관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대전문화재자료 50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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