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천 변호사
최근 10세 아동에게 술을 먹인 뒤 성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성인 남성이 항소심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을 받아 논란이 된 바가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직접적인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는 취지로 진술했고, 질문에 끄덕인 것 정도로는 현저히 곤란한 정도의 폭행·협박이라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해, 강간죄 대신 ‘미성년자의제강간죄’를 적용했다.
한편, 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성폭력을 저지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의 1심 재판부는 ‘위력은 있었지만 행사하지는 않았고, 저항을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 강제력이 행사된 구체적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는 취지로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위와 같이 재판부의 입장에 따라 강간죄의 인정 여부가 달라지고, 강간죄의 구성요건에 ‘폭행 또는 협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 하에, 우리나라에도 ‘비동의 간음죄’를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형법 제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을 강간죄의 구성요건으로 명시하고 있는데, 대법원은 ‘피해자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요구하는 최협의설의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가해자의 폭행·협박에 공포감을 느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 경우, 저항으로 인해 더욱 강한 폭행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하여 저항하지 않은 경우, 수치심에 구조를 요청하지 않은 경우 등에는 강간죄의 성립이 부정되는 경우가 많아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 왔다. 바로 이런 문제의식 하에, 형법상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이 아닌 ‘당사자의 동의’로 해야 한다는 ‘비동의 간음죄’의 도입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의 동의’를 강간죄의 성립요건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견해는, 강간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기결정권의 자유’란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하지 않을 자유인데, 폭행·협박이 없어도 피해자가 공포심이나 수치심에 사로잡혀 저항을 하지 못하거나, 진지하게 거부의 의사를 밝혔음에도 성교에 이른 경우에는 이미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의 논거를 보면, 첫째, 여성의 ‘동의’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폭행·협박과 달리 비동의 간음죄의 ‘동의’는 판단 기준이 불명확하며, 둘째, 처벌 여부가 전적으로 피해자 의사에 좌우될 수 있기에, 합의 성교 뒤 관계가 나빠져 ‘비동의 간음죄’로 고소하는 경우가 예상되며, 셋째, 여성의 의지와 능력을 폄하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비동의 간음죄’의 의의가 성범죄 전반의 입증 책임을 분산하는 것이라는 재반론도 있다. 실제로 폭행·협박이 있었음에도 성범죄의 특성상 폭행·협박을 입증하기 어려워 처벌하지 못하는 사례에 초점을 맞췄다는 주장으로, 이렇게 본다면 ‘폭행·협박없는 강간’이라는 개념은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비교법적으로 검토해 보면, 독일, 캐나다, 영국, 스웨덴 등 대부분의 선진국은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는데, 이때 형식적으로는 동의가 있었지만 위계나 위력 등 실질적으로 동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에도 처벌한다. 아울러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피해자의 자발적 동의를 기준으로 강간죄를 정의해야 한다’고 우리나라에 권고한 바 있다.
작년 8월 ‘비동의 간음죄’ 신설을 골자로 하는 형법 개정안이 국회에 대표발의됐고, 이후 비슷한 내용의 형법 개정안이 공동발의되어 현재 ‘비동의 간음죄’ 도입과 관련해 국회에 계류돼 있는 형법 개정안은 9건이나 되는데, 논의에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형법상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으로 할지, ‘당사자의 동의’로 할지는 사실 간단한 문제는 아니며, 토론회, 공청회 등을 통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여론 조사 등을 통해 국민 여론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다.
다만, 피해자 보호에 소홀하고 2차 피해를 줄 수 있는 현행 강간죄를 개정할 필요가 있으며,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하는 것이 세계의 전반적인 추세로 보여지고, 당장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바꾸기 어렵다면 기존 강간죄를 그대로 두고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하는 내용의 절충안도 가능한 점 등을 고려해 보면, ‘비동의 간음죄’의 도입 자체를 거부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보여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