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도읍' 답사한 뒤 마음 정한 조선태조, 그러나…

 도참사상은 풍수지리와 함께 삼국시대의 기록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고려시대 산수순역설(山水順逆說), 송도(松都·개성)의 기쇠설(氣衰說), 십팔자(十八子·李氏)가 왕이 된다는 설(說), 한양 천도설(遷都說) 등 도참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조선의 건국을 전후 ‘십팔자위왕’이 꾸준히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송도는 신하가 임금을 폐하는 망국의 터”라는 참설에 사로잡혀 천도를 계획했다.

처음 한양을 지목해 옛 궁을 수리하다가 왕실의 안태지(安胎地·태를 묻는 곳)를 물색하던 권중화(權仲和)가 계룡산 도읍을 상소하자 왕은 직접 답사한 뒤에 마음을 정했다. 신도안 천도는 하륜(河崙) 등이 반대하자 “한수(漢水)가 명당으로 들어간다”는 도선기에 의해 결국 지금의 경복궁에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아 천도했다.

조선 유학이 합리주의 사상과 문학 전반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도참은 표면적으로는 잠잠해진 듯했다. 그렇지만 중종 때에 신진사림파와 기성관료의 대립이 심화돼 충돌했다.

조광조(趙光祖)는 철인군주론과 엄격한 소인과 군자의 구별을 강조하면서 과감한 혁신정치를 실현하려 했기에 기성귀족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마침내 “일국의 인심이 조광조에게 돌아간다”는 유언비어가 궐내에 퍼지고 대궐 동산에 ‘주초위왕(走肖爲王·趙氏가 왕이 된다)’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이 발견되어,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또 당쟁의 와중에서 밀려나 향리인 전주에 내려와 있던 정여립(鄭汝立)은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동지회를 조직했다. 그는 전해 내려오던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奠邑興·李氏가 망하고 鄭氏가 흥한다)’의 참설을 믿어 민심을 회유했다.

한편 틈틈이 도당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거사를 계획했는데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어 산중으로 도망가다가 자결했다. 정여립 역모 사건은 결국 조선 최대의 사건인 기축옥사로 이어졌고 명분과 신분 차별을 강조하는 주자성리학에 반감하여 탈(脫) 주자성리학이 기득권 세력에 의해 차단됐다.

이처럼 도참사상은 순수한 역성혁명론으로서 왕조교체의 당위성과 정치개혁의 선봉에서 주장만이 아니라 그 배경에 신비적 분위기를 깔고 있는 하나의 예조신앙(豫兆信仰)이라는 점에서는 주술성(呪術性)과 정치사회적 지향 사이에 미묘한 변화의 바람을 통해 민심 속에 깊이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