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의 시조한담] 평시조 ‘청산은 어찌하여’
  • 금강일보 기자
  • 승인 2019.09.1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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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대 명예교수

이황은 60세에 도산서당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고 했다. 거기서 7년 동안 독서와 수양·저술에 전념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때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지었다.

<초장>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중장>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지 아니는고
<종장>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하리라

흔히 우리가 부르는 평시조 ‘청산은 어찌하여’는 이황이 지은 ‘도산십이곡’ 중 제11곡으로, ‘언지(言志)’ 전육곡(前六曲)과 ‘언학(言學)’ 후육곡(後六曲)으로 되어 있다. 언지는 뜻을, 언학은 학문을 말한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을 그치지 아니하는가. 우리도 그치지 않고 오랜 세월 변함없이 푸르리라. 영원히 학문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이 시조대로 이황은 죽을 때까지 학문의 길을 걸었다. 그는 ‘도산십이곡 발(跋)’(도산십이곡을 짓게 된 이유를 밝힌 글)에서 우리 말 노래의 가치를 이렇게 말했다.

‘한시는 읊을 수는 있으나 노래 부를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말 노래를 찾았으나 한림별곡류라고 한 경기체가는 방탕스럽게 들떠 있는 것이어서 배격하고, 이별의 ‘육가’ 형식을 본떠서 도산육곡 전후 12수의 시조를 짓는다.’

한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조선시대 사대부라 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우리말만 한 게 없다는 것이다. 가요를 풍류로 즐기려는 선각자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곡이 훗날 시조인들에게 평시조의 대표곡으로 애호되어 불리는 것도 우연찮은 일이 아닌 것 같다.
시조의 원형은 평시조다. 평시조는 원래 ‘평’이 붙지 않고 그냥 시조였다. 유예지 시절에는 시조(평시조) 한 곡뿐이었는데 그 뒤 삼죽금보(三竹琴譜)에 이르러 시조(현행 평시조)와 소이시조(현행 지름시조) 두 곡으로 늘어났다.
가곡의 만대엽은 영조 이전에 없어졌고, 중대엽도 영조 대 사람들이 즐겨하지 않았다. 결국 빠른 속도인 삭대엽만이 남아 오늘날 가곡의 한 바탕을 이루었다. 청구영언에 이르러서는 전에 없던 농·낙·편 등이 생기고, 고종 때의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이르러서는 중거·평거·두거·언편 등 여러 곡이 파생되었다. 이것이 지금의 가곡의 한 바탕을 이루었다.
현행 시조의 명칭이나 음악적 형태는 이러한 가곡의 영향을 받아 이뤄졌다. 현행 시조의 평시조·지름시조·중허리시조·사설시조·사설지름시조·수잡가 등은 가곡의 평거·두거·중거·편삭대엽·언편 등에서 영향을 받아 분화된 이름과 형태들이다.
이황은 1570년 11월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와석에서 일어나 의관을 정제한 뒤 앉은 채 운명했다. 향년 70세였다. 그가 타계하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조회를 하지 않았다.
“상례와 석물을 화려하게 하지 말고 작은 비석이나 하나 세우라.” 그는 이렇게 유언했다. 묘지석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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