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동춘당 송준길 선생님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해 거주했던 곳이다. 원래는 법동에 있었는데 지금의 자리인 송촌동으로 이사오게 된다. 잘 만든 한옥은 이렇게 이사도 다닐 수 있다. 비접착이기 때문이다. 기성복이 아닌 테일러의 맞춤같은 한옥은 고급주택이었다. 그러다보니 한옥은 내진설계를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진도 7을 이겨낼 수 있었다.

1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소대헌·호연재 고택에는 김호연재가 살았다. 백수가 넘는 시를 남깃 글천재였다. 때는 1699년, 김호연재는 19살에 송요하에게 시집왔다. 안동 김씨 명문가의 9번째 귀한 딸은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사서삼경을 읽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리고 시댁 회덕은 분위기가 달랐다. 여자는 남자의 부속품일 뿐이었다. 그땐 모두 그랬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김호연재는 제 속을 남편에게 보였다. 그러나 송요하는 넘치는 지성을 가진 부인을 탐탁지 않아 했다.
일찍이 곁을 떠나 집은 돌보지 않았다. 호연재는 외로웠다. 그럼에도 40명이 넘는 가족을 챙겨야하는 건 호연재 몫이었다. 때론 돈이 떨어져 친정과 시아주버님께 편지를 올리는데 그 내용이 구슬프다.

죄송한 맘을 어쩌지 못하고 한 줄에 한 번씩 미안함을 내보인다. 그렇게 외로운 날이면 글을 썼다. 글에는 자연스레 호연재가 들어가 앉았다.
삶은 석 자의 시린 칼인데 자신은 하나의 등불을 가졌다고 말한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고 빤한 신세 호연재의 삶은 흰머리만 늘어갈 뿐이라고 적고있다. 그날따라 더 외로우셨나보다. 그리고 슬펐나보다.

삶은 석 자의 시린 칼이라는 표현에 심장이 움푹 패였다. 어느 누구에게도 삶은 쉽지않았다.

담장에 상서화가 난초만큼 무성한데 그 꽃은 이미 올봄에 꽃대를 올리고 홀로 피었다 말도 없이 떠났다. 꽃은 잎을 볼 수 없고 잎은 꽃을 볼 수 없어 상서화라 했다. 소대헌 송요화와 김호연재의 삶이 상서화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나 가득 심어놨을까?

여인으로서 슬픈 삶이었다. 그들의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삶이 시와 함께 대전 동춘당에 남아있다. 나에게 삶이란 시린 칼이기도 하지만 복권같기도 했다. 나는 어쩌다 슬프고 우연히 행복한 삶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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