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G-스토리] 가축전염병 진화의 끝은 ‘인수공통전염병’
  • 정은한 기자
  • 승인 2019.11.0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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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한 경제부 기자
최근 한반도에 사상 첫 아프리가돼지열병(ASF)이 발생하고 저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항원이 잇달아 검출되고 있다. 다행히 ASF는 확진 기류가 잠잠해지고 AI도 고병원성으로 판명되진 않았으나 현 정부의 대응은 안일하기만 하다.
 
가축전염병이 인류를 위협한 대표적인 사례는 흑사병으로 불린 ‘페스트’였다. 이는 중국의 오지,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발병한 풍토병으로 페스트균을 지닌 검은 쥐에 기생하는 쥐벼룩을 매개로 전염됐다.
 
1330년대 초 중국에서 돌기 시작해 인구 1/3 이상이 사망했고, 14세기 중반 동서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통해 유럽에 퍼져 유럽 인구 7500만 명 중 2500만 명이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666년 런던 대화재가 일어난 뒤 빈민가 목조 가옥이 모두 태워지면서 페스트는 잦아들었다. 혹여 대역병이 부활할까 봐 런던에서는 벽돌 주택만 허용하고 있다.
 
가축전염병은 면역이 없는 숙주를 찾아 기생한다. 사람이 가축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인수공통전염병으로 진화하는 거다. 홍역은 개, 천연두·결핵·디프테리아는 소, 독감은 돼지·닭, 나병은 물소에서 유래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200여 종에 이른다. 16세기 초 구대륙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발을 딛자 가축을 기르지 않았던 원주민들이 대거 사망한 것도 가축전염병에 대한 면역이 없던 탓이다.
 
당시 신대륙엔 천연두, 수두, 콜레라, 페스트,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홍역 등의 질병이 쏟아졌고 18세기까지 원주민 90%가 궤멸했다. 반대로 구대륙으로 옮겨간 건 매독에 불과했다. 1920년대 아프리카 케냐에서 발생한 ASF가 100년 가까이 잠잠하다가 유럽을 거쳐 아시아에 창궐한 것도 어쩌면 시간이 필요했을 뿐 당위적인 결과였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ASF가 인수공통전염병이 아니며 올해 발병한 AI 항원도 가금류에 영향을 주지 않는 저병원성이라는 이유로 안일한 방역에 그치고 있다. 반면 유럽 최대의 양돈국가인 덴마크는 멧돼지 유입을 막기 위해 독일과의 국경 70㎞ 지역에 1.5m 높이의 울타리를 세웠고, 프랑스는 국경에 전기가 흐르는 울타리를 건설하는 것은 물론 군대를 파견해 멧돼지 사냥에 나섰다. 독일 정부도 1년 내내 멧돼지를 사냥할 수 있도록 법까지 개정했다.
 
심지어 ASF의 경유지가 됐던 러시아는 ASF가 돌연변이를 일으키면 인간에게 감염될 수 있다고 보고 강도 높은 대책 마련에 나섰다. 아마도 유럽인들이 ASF를 쉽사리 보지 않은 건 페스트 등 각종 전염병으로 많은 인구가 죽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을 몸속 깊숙이 체득하고 있어서다. 이에 반해 우리 정부는 뒤늦게 유엔사와 합의해 대응 강도를 높이겠다고 발표했으나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멧돼지가 넘어오는 게 분명할 경우 사살하겠다”는 단서를 달아 사태가 커져야만 움직이는 늑장 대응이 여전하고 있다.
 
정은한 기자 padeuk@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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