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뒤편에 조선 총독관저 세운 일본

 

 

조선시대의 풍수사상은 양기(陽基) 위주의 도읍풍수로부터 시작되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가 안정화됐고 효(孝)의 관념이 적극적으로 부각되면서 점차 음택 위주의 묘지풍수로 전환됐다. 중기에 접어들어 당파 싸움과 전란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적으로 민심의 동요가 일어날 시기에 광해군에게 풍수지리설에 의한 이의신(李懿信)의 상소로 경기도 교하(交河) 땅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실패한다. 최근 최창조 교수의 새로운 통일 수도의 입지로 경기도 파주의 교하가 거론되기도 하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묘지 혹은 개인의 주택을 대상으로 하는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성격의 풍수가 대종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창한 실학자들에게 신랄하고 격렬하게 공격당하기도 했으나 지리학에는 이중환의 ‘택리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 많은 연구 성과를 남겼다. 말기에 들어서는 풍수를 통한 민중들의 세계관을 표출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풍수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 3교를 통합하고 나아가 전통적 민족사상까지 포괄함으로써 민중의 구심점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동학(東學)이 창시됐고 성리학의 윤리관뿐만 아니라 민간신앙과 풍수지리설을 기반으로 하는 ‘정감록’과 개벽사상이 널리 민중들 사이로 전파하게 됐다.

조선의 시대가 가고 일본에 의한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정책이 시작됐다. 전국적으로 풍수지리에 대한 방대한 조사를 실시했고 토목 공사라는 명분을 세워 우리의 주요 산천을 고의로 자르거나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를 끊었다. 나아가 풍수지리 사상을 미신(迷信)으로 일축하여 비하(卑下)했고 한반도의 지형을 토끼 형국으로 비아냥거렸다. 조선 총독 관저를 조선 도읍의 최고인 경복궁 뒤편에 세워 지세(地勢)를 억누르는 만행을 일삼았고 전국에 산재되어 있던 조선 왕실의 태실을 한 곳에 모으면서 허물고 그 잔재를 없애는 등 조선의 재건을 막았다. 이 모든 행위들은 우리의 전통사상인 풍수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고, 민족 전통문화와 풍속을 없애기 위한 정책으로 일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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