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들은 장례식도 축제 분위기?

1517년 당시의 대부호였던 푸거(Fugger)가에서는 자그마치 1000굴덴을 아우구스부르크의 카타리나 수도원에 기증했다. 돈 단위를 잘 모를지라도 일단 0이 3개이니 큰 액수라는 것이 짐작된다. 1410년 비엔나에 살았던 사람이 남긴 유언도 보자. 그는 자신의 사후영혼을 위해 성지순례의 장소와 그 회수도 정했는데, 로마·아헨에 각각 한 번, 성모성지에는 다섯 번, 그리고 다른 성지에는 서른 번 가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 빌어 달라고 했다.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기지만, 후손들이 어길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후손들 역시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마찬가지였고, 또 조상이 잘 되면, 자식이 잘 되고, 나중의 후손들도 잘 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482년 빌헬름 3세가 죽으면서 한 수도원에 부탁했던 서류가 마그데부르크에 남아 있다. 기도 부탁을 받은 수도원이 만약 이런 저런 이유로 망자의 기도와 미사를 어길 경우, 수도원 원장은 28페니히와 그에 따르는 이자를 죽은 빌헬름 3세의 후손들에게 지불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당시의 28페니히는 어마어마한 돈일 듯하다.

물론 유언장을 떠나서라도, 일단 귀족들이 죽으면 온 교구와 수도원에서는 30일간의 기도를, 민중 역시 죽은 제후를 위해 의무적으로 기도를 바쳐야 했던 때도 있었다. 1482년 튀링겐 방백 빌헬름 3세가 죽자 과부 카타리나는 죽은 빌헬름을 위한 30일간의 기도를 민중에게 공포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다.

◆ 천국행을 위한 미사?

좀 다른 얘기지만 귀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축제 분위기를 안고 태어났을 터인데 죽어서도 마찬가지였음을 독일 사학자 스피쓰 교수의 저서에서 보는데, 바로 천국행과도 연관 지은 참례이다. 한 예로 프리드리히 2세가 1471년 한 귀족의 장지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4500명의 사람과 1902마리의 말을 동원했다는데, 이 사람들 중에는 망자를 위해 기도할 557명의 수도자들이 포함되었다.

1476년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장례식 때의 모습도 보자. 8명의 제후, 17명의 수도원장, 600명의 수도자가 참여했는데, 당시의 자가용이었던 말은 3500마리까지 동원되었고! 낯선 사람을 사서 일일 고용인들을 장례행렬 속에는 끼우기도 했다. 1509년 바이에른의 알브레히트 4세는 일당을 지불한 50명의 가난한 이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고는 손에 촛불을 들게하고 장례행렬의 뒤를 그냥 따라가면 되었다. 그리고 사후세계와 연관 지우는 서양의 명당자리는 바로 교회의 제대 자리다.

출처: ‘기독교 사상’ 2019년 6월호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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