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 차지하려 교회에 많은 돈 희사한 귀족들

독일 카셀박물관에 진열된 당시 귀족의 장례식 장면. 이들은 가족과 친인척뿐만 아니라 일당을 주고 고용한 가난한 이들에게 옷을 입혀서 장례행렬 뒤를 따르게 했다. 일단 배불리 먹을 수도 있었고, 공짜 옷을 얻었다 보니 가난한 이들이 장례식 참례를 특히 선호했다.

[금강일보] 서양 교회의 제대 아래에는 지금도 많은 시신이 묻혀 있는 것을 종종 보는데, 다 이런 이유 때문이고, 또 이런 명당을 차지하려고 귀족들은 많은 돈을 교회에 희사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이런 명당에서 1000번의 조상 미사를 바치기도 했다. 특별히 유명한 성인이 이런 명당 자리에 묻혀있는 경우는 신자들이 몰려들어 기도를 하면서 많은 돈을 바쳤는데, 바로 신 곁에서 살고 있을 이런 성인들은 가장 빠른 기도 전달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이런 성인의 성물을 지니기 위한 경쟁도 빠지지 않았는데, 중세사가인 로베르트 올러교수의 저서에 보면 한 수녀원에서 성녀처럼 살았던 수녀가 죽으면 동료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는데, 이 수녀의 성물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물로는 특히 성인의 손가락에서 잘라낸 손톱, 발톱, 아니면 몸에 붙은 털 등을 선호 했다고 밝혔다. 마르쿠스 마이어 교수의 저서 '돈, 권력 그리고 성물'에 그 유명한 가톨릭의 성녀인 엘리자벳(1207-1237)의 경우가 나온다. 그녀가 죽자 그녀의 얼굴을 감았던 천, 손톱과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그녀의 귀와 가슴까지 잘랐다고 한다.

또 다른 얘기는 로물라드 폰 라벤나 (+1027)가 그가 세운 수도원을 떠나고자 할 때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이유는 이 로물라드는 살아 생전에 이미 성인처럼 공경을 받았다 보니, 이 사람이 떠나기 전에 때려 죽일려고(erschlagen) 했다고 한다. 200년이 지난 후에 또 다른 비슷한 예로는, 바로 그 유명한 프란치스코 성인(+1226)에 관한 얘기다.

그가 마지막 여행을 마치고 아씨시로 돌아 오려고 할 때, 그는 페루지아를 통해서는 들어 올 수가 없었고, 먼 길을 돌아서 간신히 아씨시로 들어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면 그곳에 사는 이들이 이 성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성인이 죽고나면 성물을 자기 도시에 영원히 간직하고픈 열망 때문이었다고. 출처: ‘기독교 사상’ 2019년 6월호 (다음회에 계속)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