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행복해라 그리고 훌륭한 부모가 돼 거라

배냇짓을 하며 쌔근거리던 아이가 잠에서 깼다. 대개는 잠투정을 하느라 앙앙거리기 마련인데, 엄마에게 눈 한 번 맞추더니 이내 순백의 웃음을 짓는다.해맑다 못해 눈이 부신, 세상 그 어떤 말로도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순수의 세계가 그 앙증맞은 얼굴에 그득하다. 품에 안긴 아이와 아이를 품은 엄마의 입가에 꼭 닮은 미소가 흐른다. 생후 94일된 미소 천사 세진이네 집은 그렇게 엄마 한성희(48) 씨와 세진이의 일상이 고요하게 배어있다. 사실 세진이는 성희 씨가 가슴으로 키운 열여덟 번째 자식이다. 그리고 지금 세진이네 집엔 세진이가 없다. 해외 입양을 대기 중인 세진이. 위탁모 성희 씨는 지금 열여덟 번째 멍울을 자가 치료 중이다.#1. 순둥이 세진이의 일기“여기 좀 보세요. 지금 쉬를 하려고 합니다.” 다급히 기자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신이 나 있다. 성희 씨가 세진이를 안고 있는 곳은 생뚱맞게도 안방 화장실이었다. “쉬∼ 라고 말하면 금방 눕니다. 그것도 시원하게요.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생후 6주째부터 소변을 가렸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 하면 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믿지 않는 눈치였는데 기자님들이 증인이네요. 우리 세진이 영리하죠.” 세진이는 생후 이틀 만에 생모의 곁을 떠나 성희 씨 슬하에 들었다. “아이가 참 순해요. 칭얼거리는 법이 거의 없죠. 원체 잘 웃고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아이랍니다.”90여 일 세진이의 육아일기는 CD와 USB에 저장돼 있다. CD는 세진이 양부모에게 줄 요량이란다. 지금껏 열일곱 아이들의 성장기도 그렇게 새 부모에게 전달됐다. 세진이는 성희 씨 손을 가장 많이 탄 아이다. 보통 국내 입양은 한 달, 해외 입양은 12주 정도면 이뤄지는데 세진이는 100일 가까이 성희 씨의 사랑을 받고 있다.“며칠 있으면 백일입니다. 조촐하게나마 잔치를 열어주려고 했는데…….”울먹이는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진이는 여전히 천사표 미소로 엄마를 주시했다. #2.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인터뷰 전날(5월 5일) 성희 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고 한다. 사연인즉 세진이의 해외 입양이 결정돼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으련만 억장이 무너지니 이번 가슴앓이는 또 얼마나 갈꼬.아이를 떠나보낼 때마다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는 성희 씨. 집안 한가득 물씬한 아이의 향기를 견디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십 수 년 이 일을 해 온 분들도 무척이나 힘들어 해요.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잖아요. 탯줄도 떼지 못한 핏덩이들이 살 붙고 사람 알아보고, 그 함께 보낸 시간 어찌 쉬 잊혀 질까요. 그 어린 아이들도 이별을 직감하는지 며칠 전부터 유난히 보챕니다.”#3. 우리 공자님, 우리 공주님성희 씨가 위탁모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7년 11월이다. 99년 세 번의 큰 수술 후 3년의 회복기를 겪고 난 뒤였는데 지금도 몸이 약간 불편한 상태다.“남편과 딸아이가 도와주겠다고 적극 권장하더군요. 그런데 제 건강상 이유로 퇴짜를 맞았어요. 몇 번의 재도전 끝에 첫 아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신기하고 가슴이 벅차던지. 어디서 이렇게 예쁜 아이가 왔을까 지금까지도 버릇처럼 되뇝니다.”그 순간부터 부부 침실이 아가방이 됐단다. 따로 재우자니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하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 아이들이 있다.정상적인 집에서 태어났으나 생활고로 버려진 아이, 항문이 두 개여서 혹여 문제될까 이 병원 저 병원 들쳐 업고 다니던 아이, 성장이 더뎌 자폐가 의심됐던 아이와 보낸 시간이 어제처럼 또렷하다.“데려갈 날짜까지 받아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이를 서로 안아보려는 극진한 모습에 고마움이 절로 솟습디다. 공개 입양한 사내아이와 친딸의 성장기를 블로그에 올려 제가 볼 수 있도록 배려한 젊은 부부에게서 진한 사랑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이 공자님, 공주님으로 다시 태어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답니다.”성희 씨는 운이 좋은 편이다. 품안에 아이들 중 낯설고 물 설은 해외입양보다 국내 입양이 많았던 데다 양부모의 자세도 안도감을 갖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4.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품어야버려져 죽거나 방치된 갓난아기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성희 씨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궁극적으로 이 땅에 위탁모가 없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이 수시로 떠오른다.이 세태가 야속하지만 그래도 벌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몸이 성숙하는 만큼 정신도 성숙되도록 사회적 차원에서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미혼모만 따갑게 바라보는 시선은 독이죠. 남자는 아빠 되기, 여자는 엄마 되기 가치관 정립이 절실합니다. 국가의 몫도 중요합니다. 선진국처럼 법적 보호 장치를 통해 미혼모, 미혼부들이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도록 제도화한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죠.”성장기에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는 해외 입양아 문제가 심심찮게 들린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품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국내 입양 문화를 향한 따끔한 충고로 이어진다.“처음엔 저도 입양을 하려 했습니다. 건강도 건강이려니와 나이로 볼 때 외동딸에게 짐이 될까 뜻을 접었지요. 국내 입양이 예전보다 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만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아이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가슴으로 길러야죠.”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에 혼잣말로 새기는 주문, ‘네가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훌륭한 부모가 돼 거라’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천사들과 만나고 싶다는 성희 씨는 지금 생채기를 털고 열아홉 번째 자식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글 이인회 기자 sindong@ggilbo.com·사진 이성희 기자 token77@ggilbo.comTip: 입양의 날매년 5월 11일은 입양의 날이다. 건전한 입양문화 정착과 국내입양의 활성화를 위해 제정한 날로 2006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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