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협동조합 이사

[금강일보] 1905년 조선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1910년 끝내 나라를 잃었다. 이렇게 급격하게 빼앗기게 될 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급하게 한반도와 만주, 간도, 상해, 멕시코, 미주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나 분노해서 일어난 오합지졸의 의병에게 승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거대한 일본 제국주의 불꽃 속에 억소리도 못하고 쓰러졌을 뿐이었다. 일본은 헌병을 보내 통치했고, 조선사람은 거리에서 태형을 당하며 수모를 당했다. 국내 독립군은 대토벌 작전으로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한반도에서는 이렇게 온통 독립을 원한다면 합심해서 정부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 만들어졌다. 국내에서 쫓겨났던 의병은 만주와 간도에서 재집결했다. 일제는 1920년 5월 조선 독립군 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을 펴게 됐다.
3·1운동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던 일제는 독기를 품고 독립군을 토벌했다. 덕분에 문화통치가 시작돼 신문이 간행되고 잡지가 열렸다. 이때 홍범도가 이끌었던 대한독립군은 북간도 독립군과 연합해 만주 지린성 봉오동으로 집결, 한반도 진공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첫 승리였고 그 승리는 때마침 열린 신문을 통해 대서특필돼 한반도에 전해졌다. 그날의 감동을 나는 안 보고도 느낄 수 있다. 삼천리 강산이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4개월 뒤 다시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대첩에 서게된다. 대승을 거두었고 일제는 처음으로 조선독립군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개인 홍범도에게는 참혹했다. 장군을 잡기 위해 가족들을 감금했고 부인은 고문을 당하다 죽게 된다. 아들은 아버지와 나선 전투에서 전사하며 장군의 가슴에는 메우지 못할 구멍이 생겼다.
러일전쟁에서 고개를 숙인 러시아는 일본이 두려워 조선독립군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독립군을 지원하겠다는 거짓말로 무장을 해제했고 그렇게 전설의 스나이퍼는 제 총을 버리고 자유시에 들어갔다. 자유시 참변이라고 한다. 곧 스탈린은 조선사람들을 강제 이주했고 20만 명에 섞여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셨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일본과 한편인 독일군과 러시아가 전쟁을 한다고 하자(스탈린그라드전투) 장군도 싸우겠다고 러시아군에 의사를 비치니 러시아 군이 늙은이가 무슨 참전이냐며 무시했다. 그러자 장군은 가장 작은 동전을 던지라며 지시하고 동전을 공중에서 총알로 관통시키는 식지 않은 실력을 내보이셨다. 끝내 극장의 수위로 살아가시다가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하시고 1943년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홍범도 장군의 행적은 전설처럼 남아 조국에 전달됐는데 그분을 모셔오는데는 무려 사후 78년이 걸렸다.
구소련과 연합작전을 이어갔기에 사회주의자라는 찍힘으로 귀환소리도 못냈고, 평양출신이라 북한의 반대가 있었으며 노비출신이라 집안의 송환 노력이 없었다. 가족이 모두 돌아가셔서 연결점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이제와서 뭘 모셔오냐며 관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잊지않고 코로나 시국의 온 국민이 아픈 중에도 모시게 됐다. 그 미안함과 감동이 한몸이 돼 오늘 홍범도 장군을 뵙고 오는 길이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조국에 품에서 영면하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삶으로 바꾼 귀한 영혼들이 지금도 타국에서 떠돌고 있다. 그 다음은 이범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