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14~15대 총장

[금강일보] 사자성어 중에 비슷한 개념을 공유하는 말들이 있다. 예컨대 ①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끼리의 공감과 이해/홀아비 심정은 과부가 안다/吳越春秋) ②골육지정(骨肉之情/뼈와 살이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듯, 가족이나 친척끼리 느끼는 인정) ③결초보은(結草報恩/풀을 엮어서 은혜를 갚는다. 죽은 후 혼령이 돼서도 은혜는 갚는다/左傳) 등이 있다.
중국 고대의 전법(戰法)에도 이런 말의 사례가 있다. 오기(吳起/B.C 440-381)는 위나라 사람으로 노나라. 위나라, 초나라에서 벼슬을 했고, 오자병법(吳子兵法)을 저술한 사람이다.
그는 장군임에도 가장 낮은 계급의 병사들과 입는 것과 먹는 것을 같이 했다. 누울 때도 자리를 까는 법이 없었고, 행군할 때도 수레를 타지 않았으며 남은 식량 보따리도 직접 들고 다녔다. 등에 종기가 난 병사가 생기자 오기 장군은 자기 입으로 종기의 고름을 빨아내 치료해주었다.
그 병사의 어머니가 이 소문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니까 이웃 사람들이 우는 연유를 물었다. “당신 아들은 하급 병사인데도 장군께서 친히 종기의 고름을 뽑아내 주셨는데 어찌하여 우는 것이요?” 그때 그 어머니가 대답했다. “지난번에 그 장군께서 제 남편(그 애의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준 적이 있었는데 전쟁이 극심하게 벌어졌을 때 그 애아버지가 끝까지 후퇴하지 않고 전쟁에 임하다가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오. 그런데 이번에 또 제 자식의 등창 종기를 빨아 주었으니 제 아들 또한 언제 죽을지 몰라 내 이리 우는 것이요” 군사 작전 현장에서 명 지휘관의 용병술이 돋보이는 사례이다.
또한 이광(李廣/B.C 119년경)은 전한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를 거쳐 무제(武帝)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평생을 흉노와 전쟁을 치른 역전의 맹장(猛將)이다. 그는 말타기와 활쏘기의 명수(名手)였다.
행군 중에도 병사들이 모두 물을 마시기 전에는 물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병사들이 모두 먹지 않으면 밥 한술 입에 넣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먹고 잤다. 병사들에게 가혹하지 않았고, 너그럽게 대했으며 받은 상(賞)은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나라에도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예 육군 중장)이 사병 묘역에 병사들과 함께 묻혀있다. 흉노는 그의 용맹함과 지략을 두려워했고, 한나라 병사들은 그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길 원했다. 명장(名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는 말이 통한 것이다.
40년 이상 여러 자리(職位)를 전전했지만 평생 재산 따위를 모으는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아 재산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는 말재주(言辯)도 없고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병사들은 기꺼이 그의 명령에 따랐고, 그를 존경했다. 사마천도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자기 몸(행실)이 바르면 명하지 않아도 시행되며 자기 몸(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명을 내려도 따르지 않는다(논어/자로편)고 한다. 이는 이광 장군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내가 이광 장군을 본 적이 있는데 성격이 소박해 촌사람처럼 말도 잘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천하 사람들은 그를 알든 모르든 모두 그를 위해 슬피 애도하였다.
사람의 일생은 끝이 좋아야 한다. 우리는 국가 원수로 일했어도 교수대 사형으로 마감하거나, 국외로 망명하거나 교도소에 수감되는 사례를 보아 왔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것이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많이 웃는 자이다. 야구 경기는 9회 말까지 봐야 한다. 사람 평가는 죽어 관뚜껑을 닫은 후에야 진짜가 나온다. 노름판 돈은 새벽 문턱 나갈 때 봐야 알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