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금강일보] 임진왜란 중 선조의 간장종지만한 인격은 미친듯 끓어 올랐다. 백성을 버리고 의주를 거쳐 명나라로 넘으려 했으나 전쟁에 끼고 싶지 않았던 명의 반대로 압록강 앞에서 멈췄다. 신하들과 병사들은 왕을 버리고 도망쳤고 백성은 왕의 가마에 돌을 던졌다.
남해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이순신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선조의 열등감은 분노가 되었다. 잠시 전쟁이 잠잠해지자 금부도사를 보내 이순신을 파직하고 서울로 압송했다. 왕의 명령을 능멸한 죄였다. 바다는 본 적도 없는 자가 해전을 지시하니 이순신은 따를래야 따를 수가 없었다.
피해의식에 쩔어 열등감이 증폭된 자의 그 졸렬함은 살다 몇번은 만나게 되지 않던가? 이유는 없다. 그저 '이순신'이기 때문에 싫었던 것이다. 적장의 목을 베어온다해도 용서치 않겠다며 사형선고를 내리게 되는데 이항복과 권율이 목숨을 걸고 변론하여 살려낸다. 그 이후에도 이유없는 선조의 집요한 이순신 괴롭힘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어제까지 삼도수군통제사로 남해 바다를 장악했던 장수를 백의종군시켜 졸(卒)의 자리에 서게 하고 나서는 그 낯짝으로 다시 정유재란이 터지자 해군장교로 복귀시킨다. 그러나 3단계 강등된 신분이었다.
아무리 인격이 출중한 이순신이라 해도 출옥한 4월 1일에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셨다. 괴로웠을 것이다. 이틀 뒤인 4월 3일에 말을 타고 출발해 다음 날인 4일에 수원, 다다음 날인 5일 아침에는 아산 본가에 도착한다.
도성에서 아산까지는 이틀간 110㎞를 전력질주한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산에 도착하기 전 배 위에서 돌아가셨기에 이순신은 죽은 어머니를 맞이해야 했다. 피에 사무치게 그리운 어머니의 삼일상도 마치지 못하고 전쟁터로 떠나게 된다. 그만큼 나라의 안위가 백척간두였다. 그뒤 막내아들도 떠났다는 소식을 편지로 받게된다. 같은 해 4월과 10월이었다. 이순신은 그때 스스로의 표현대로 가죽 빼고 모든 것이 죽은 것과 같았다.
같은 해 12월 선조는 이순신에게 고기를 보낸다. 언뜻보면 고기 자시고 몸을 추스리라는 듯 보이지만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삼년상 기간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이순신을 놀리는 처사였다. 어머니를 잃고 심장을 도려내어 그 자리에 자식을 묻어야 했던 이순신한테만큼은 야비한 왕이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단 한번도 선조 탓을 한 적이 없었다. 나였다면 일본에 귀순하였을 것이다.
그 시대 리더는 과연 누구였을까? 사람은 모르고 역사는 안다. 이 시대 현상을 꿰뚫을 진정한 리더를 기다려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