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협동조합 이사

[금강일보] 아버지가 코마 상태에 빠지셨고 나는 요즘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합니다. 국가는 치매와 중증환자에 대한 혜택을 늘려 다행히 병원비가 무겁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길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어떤 꿈을 꾸고 계실까요? 빵집에 왔다가 아버지 생각이 겹칩니다.
어느날 집에 빵이 두 개 남아있었는데 그건 내것이었습니다. 소화력이 바닥이었던 그 어린날 나는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는 음식을 조절했습니다. 100% 토하니까요. 그럴때면 내가 먹고 싶어할까봐 엄마는 나만 업고 길로 나오셨어요. 토하는게 제일 힘들었던 나는 음식이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때 그 빵은 너무나 먹고 싶었어요. 등에서 잠이 들었고 눈뜨니 다음 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빵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때 옆집 형제가 우리집에 놀러왔는데 아빠는 내 빵을 그 애들에게 주셨어요. 나도 당황했고 엄마도 당황했어요. 나는 울기 시작했어요. 내가 울면 뒤로 넘어갈 때까지 울었거든요. 그때는 고집이 지금보다 더했어요. 아버지는 쿨하게 등을 돌려 외출하시더라구요.
나는 끈기를 가지고 울었고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울었습니다. 그 자리를 유지하고 우는 건 떼쟁이의 기본입니다. 나는 한기를 느꼈지만 그래도 울음을 끊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흠칫하시긴 하셨지만 그냥 지나치셨습니다. 나는 그대로 넘어갔고 눈뜨니 병원이더라구요. 자주있는 일이었습니다. 1년에 8할을 아팠던 저였거든요.
힘이 없어서 눈을 뜨면 가만히 다리를 주무르는 가족 중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황도를 쪼개서 입에 넣어주는 아버지가 눈앞에 계십니다. 나는 앙다물고 안먹었습니다. 죽어도 안 먹을 아이죠. 빵을 다시 사온다고 해도 안 먹을 작정을 하는 고집 센 어린이였습니다.
등을 지고 누운 내가 듣거나 말거나 어린 나에게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잘살아야 그 복이 너한테 가는거여. 나중에 네가 잘 살아야 그 복이 네 자식에게 가는거여.”
그땐 몰랐고 이제는 압니다. 병신 자식이(간질병을 않던 오빠) 어디서 쓰러질지 모르니 아버지는 이웃에게 잘해야했던 겁니다. 아버지는 온마을 공공용품인듯 우리집 물건을 빌려주셨고 먹거리도 넉넉히 나누셨습니다. 힘든 일도 도맡아 하셨습니다. 그 덕일까요? 오빠는 어디에서 발작을 해도 크게 다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큰마음을 이제는 알고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