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협동조합 이사

대학만 졸업해도 취업이 되던 시절을 넘어 이제는 유려한 전공과 자격증으로도 취업이 어렵다. 일하고 싶어서 오늘도 동분서주하는 이땅의 젊은이에게 보내는 글이다.
취업은 이순신에게도 어려웠다. 20살까지 문과시험을 준비한 이순신은 결혼을 하면서 장인어른과 같은 무과로 전향한다. 이 과정이 문과 준비생에게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무과를 28살에 처음 보았으니 기초체력 훈련이 되어있을 리가 없다. 보통 무과 시험은 직업 군인이 승진하기 위해 보기 때문에 일반인인 이순신이 쉽게 도전하기는 어려웠던것 같다.
첫 시험에서 말에서 떨어져 기절했다가 다시 일어나 자작나무 껍질로 부목을 대고 다시 말에 올라 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고 어릴 적 교과서에서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말 위에서 밥도 능숙히 먹을 만큼 말타기에 익숙해야 할 무과 수험생이 말에서 떨어진 건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이 충무공 전서에도 떨어져 혼절했고 시험도 낙방했다고 나온다.
32살에 공무원이 되었고 12등, 병과 합격이라서 이순신이 객관적으로 뛰어난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하는 의견들이 많다. 그럼 살펴보자.
무과는 4년에 1번 열리는 정시로 총 합격 인원은 29명이다. 전국 29명이라는 말이다. 식년시 무과의 합격자 평균 연령은 34세였으니 늦은 나이도 아니었다. 이순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17명이나 있었다. 최연소 합격자는 23세였고 최고령 합격자는 52세였다. 이를 볼 때 이순신 장군의 객관적 성적은 나쁘지 않다.
어렵게 무과 최말단직에 합격했던 인문학 전공자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자주 스스로 점을 친다. 스스로 주역을 공부하여 점을 치는 것인데 주역은 성리학의 맨 마지막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문과 공부를 오래 하다보니 사서삼경을 비롯한 수많은 경전을 탐독했고 취미도 독서였다.
문과적 지식은 무과에서도 빛을 발하여 이순신은 선비의 역할을 수행했다. 바로 기록하는 것이다. 유교라고 말하는 것은 종교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사후세계와 영생에 대한 구조가 짜여있어야 한다. 그 구조에 따라 선비들은 영원히 살게 된다. 왜냐면 선비는 자식을 자신과 똑같이 키우거나 제자를 똑같이 키워 몸은 사라져도 정신을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식이, 제자가 말을 듣더냐? 그래서 선비는 자신의 삶을 글로 적어 남겨 후세에도 살아남았다. 이순신은 선비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난중일기를 적은 것이다. 또한 보고서인 장초를 쓰기위한 기초 자료이기도 했다. 임진왜란은 난중일기로 완벽히 재현되었으니 이순신은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도 전쟁 중에 일기를 쓴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으니 이순신의 마음속은 망중한이었나 보다.
나의 전공이 꼭 취업을 위한 것은 아니다. 부디 배움을 슬퍼하지 말고 어느곳에서도 자신이 심취했던 공부가 배어나올 것이라는 걸 잊지 말고 힘내라는 글을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