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랩대전 참여 노형규 작가
프랑스 낭트서 전시·판매 경험
작가들과 교류하며 견문 넓혀
통념 벗어던지는 ‘태움의 미학’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돼

관찰력은 인간이 가진 위대한 인지능력 중 하나다. 무엇보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관찰력은 결코 빠질 수 없는 지적 능력이다. 자연의 위대한 관찰자이자 탁월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의 창시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여인을 창조했고, 허리 꺾이는 고통 속에서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눈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에 걸맞는 천지창조를 만들어냈다. 미술작가의 삶을 시작한 그가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훗날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원대한 꿈을 꾸고 있다. 이응노미술관 아트랩대전에 참여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세계 미술의 흐름을 읽고 돌아온 노형규(30) 작가를 만났다.
프랑스행을 예고하는 전화를 받았을 땐 실감 나지 않았단다. 프랑스는 미술관 투어의 형식으로 10여 년 전 파리를 방문한 게 전부이고 유학도 독일을 고려했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독일로 유학을 준비하며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 당연히 저 말고 다른 분들이 될 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처음 연락을 받곤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파리 정도는 미술관을 들러보고 싶어서 잠깐 가본 적은 있지만 그중에서도 낭트는 생소한 도시였으니까요.”

아트랩대전 작가 중 자그마치 6.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프랑스행 티켓을 거머쥔 그였지만 급작스러운 출국은 두렵기도 했다. 올해도 여러 활동을 해왔어도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적잖아서다.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라 느끼는 순간도 유독 많았던 한 해였기에 아트랩대전에 이은 프랑스 낭트 방문은 미지의 세계로 첫 발과 다름없었다.
“프랑스 낭트는 예술을 좋아하는 도시였습니다. 파리만큼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도시였죠. 현지 갤러리에서 전시와 판매도 하고 파리레지던시 작가들과 교류도 하면서 견문을 넓히는 시간이었어요. 서로 다른 작품관에 대해 이야기하며 흥미롭고 재밌게 지내다 왔습니다.”
지난달 프랑스로 출국해 이달 초까지 체류한 노 작가에게 이번 전시는 여러모로 긴 여운을 남긴다. 작가의 삶을 시작한 지 이제 불과 채 5년이 안 된 그였기에 신참 딱지를 떼고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갈 순간을 만들어줬기 때문일 게다.
“프랑스에 가면서 제가 준비한 건 사실 작품뿐이라 뭘 가지고 갈지까지도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시를 하면서 내 작품도 외국인들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무척 뿌듯했어요. 현지 교수님 한 분이 제 그림을 보곤 ‘찌르는 듯한 감명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결국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작가 개인의 역량에 달렸다는 말이니까요.”

그랬다. 노 작가 자신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길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는지 모른다. 음악에 관심 많던 꼬마가 우연찮은 계기에 미술로 전향, 서양화를 전공하고 어엿한 작가가 됐지만 자신조차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일지 가능성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던 까닭에서다.
“제 미래를 위해 작품을 보러오고, 선뜻 구입도 해주신 분들 덕분에 큰 힘을 받았습니다. 나도 계속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죠. 프랑스에서 제 예술에 대해 솔직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게 제일 좋았던 거 같아요. 미성숙함에서 벗어난 기분 정도라고 할까요?”
이제야 미성숙함에서 벗어났다곤 하나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퍽 나이에 걸맞지 않은 연륜이 묻어나온다. 돈 많이 벌고, 성공에만 매달리며 사는 인간사에 대한 통념을 벗어던지고 싶다는 노 작가의 굳은 신념이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 늘 무언가를 태우며 자신과 사회를 성찰하는 그의 작품에서 다가온 소회다.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고자 하는 작품들을 그리려고 해요. 좋은 대학 나와야 하고 돈 많이 벌어야 성공한 것이라는 모호한 통념을 태워서 나다운 모습을 찾고 싶은 거죠. 제 그림이 사회를 바꾸진 못하더라도 나 자신이 바뀌면 사회를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고 싶은 생각을 태움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짧지 않은 작가의 여정이지만 오래 묵은 내면의 생각을 작품으로 내보이며 실제로 여러 부분이 변하기도 했다. 조금 더 젊었을 때만 해도 패기로 어른들의 말을 이겨보려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면 요즘은 한 번 더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자신이 보이더란다.
“사회가 뭔지도 모를 적엔 돈, 성공에 대해 걱정어린 시선이 싫어서 반항심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직접 나와보며 부딪치다 보니 슬프더라고요. 돈, 성공이 나에게 뭘까 하고요. 그래서 절제를 해보기로 하고 내 고민을 태워 보니 상황이 호전되더라고요. 한 발 떨어져서 상황을 면밀하게 보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365일 중 올해 달력은 단 한장 남았다. 노 작가도 다사다난했던 1년의 마침표를 준비하고 있다. 빡빡한 스케줄이었지만 오히려 바빠서 좋았다는 그는 내년엔 고대했던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구상으로 바쁘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다.
“다음 달 모교인 한남대학교에서 동아리전만 치르면 올해 활동은 다 끝납니다. 원래 작가 한 사람이 개인전을 1년에 세 번 하기가 어려운데 저는 개인전과 단체전을 세 번씩 했으니 정신 없이 바빴죠. 그래도 작업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내년엔 작업이랑 공모전도 계속 나가고 독일 유학도 준비해야죠.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노형규는 어떤 작가로 남고 싶냐’는 마지막 질문에 꽤나 유쾌한 답이 돌아온다. “미술사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왕 시작한 거 교과서에 한 줄이라도 남길 만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도전하는 삶을 살자. 노 작가의 청춘은 진행 중이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