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베드로광장과 베드로성당

바티칸 혹은 로마교황청은 로마 시내에서 테베레강 서쪽으로 약 20㎞가량 떨어진 로마 속의 작은 도시국가다. 바티칸(Vatican)이란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라는 라틴어 ‘바테스(Vates)’에서 유래되었는데, 로마인들이 성지로 인정하던 곳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주요 유적이 대부분 언덕 위에 자리 잡았듯이 바티칸도 ‘바티쿠스 언덕’이라고 부르던 곳이었는데, 40년 칼리굴라 황제가 이곳에 로마인들이 즐기는 격투기 원형 경기장을 지었다. 그런데, 네로 황제(37~68)가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른 대화재의 범인으로 지목한 수많은 기독교인을 이곳에서 죽였고, 67년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베드로를 비롯한 기독교도들도 이곳에서 처형하고 묻었다.

이렇게 사교(邪敎)로 취급받던 기독교는 306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북쪽 밀비우스 다리(Pons Milvius)에서 막센티우스에게 기적 같은 승리가 십자가의 계시였다며. 제위에 오른 뒤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양지로 나오게 되었다. 324년 베드로가 묻혀있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성당(Basilca di San Pietro)을 짓고, 또 라테라노 궁전도 교황에게 기증했다. 오늘날 바티칸은 9세기 서울 경복궁 넓이만 한 사방 700m가 채 되지 않는 0.44㎢(약15만 평)에 800명이 사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다.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하고, 내부는 1506년부터 스위스 출신 용병 100여 명이 지키고 있다. 그래도 독자적인 신문사, 방송국, 은행이 있고, 화폐를 발행하고 있고, 가톨릭의 총본산이라는 정신적 지주이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훌륭한 예술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다.

바티칸성당에서 바라본 광장
라오쿤 상
벨레데레 전시실

476년 게르만족에게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로마는 오도아케르와 동고트족의 지배를 받았으나, 이탈리아 교회들은 로마의 주교에 복종했다. 기독교 후원자들로부터 기증을 받으며 재산을 늘여온 교황은 6세기부터 영적, 세속적 주권을 행사하는 군주제 국가로서 교황령(Status Pontificius)을 갖게 되었다. 특히 751년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비밀리에 카롤링거 왕조의 단신왕(短身王) 피핀(714~768)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피핀 2세는 이탈리아반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주장을 물리치고 이곳을 빼앗아 로마교황청 관구로 주었다. 그리고 781년 샤를마뉴는 교황에게 로마 공국 이외에 라벤나, 베네벤토, 토스카나, 코르시카, 롬바르디아 등까지 영토를 확장해주자,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를 초대 ‘로마 황제(Augustus Romanorum)’로 임명하는 대관식을 거행하여 '서로마제국의 부활'이라고 했다.

그러나 11세기 중반부터 프랑크왕과 교황 간의 성직 임명권 문제, 교황령 문제로 갈등이 생겼다, 즉, 교황령이 프랑크 제국의 일부이고, 또 교황은 그 지역의 행정감독자인지 권리관계 설정이 불분명해지면서 생긴 분쟁은 2세기 동안 벌어졌는데, 마침내 십자군 전쟁에서 패한 뒤 교황의 권위가 크게 실추하자, 1309년 프랑스 국왕 필립 4세는 교황 클레멘스 5세를 프랑스 남부 아비뇽(Avignon)으로 옮겼다. 이것을 아비뇽 유폐(幽閉)라고 한다.
1378년 교황청은 다시 로마로 환원되었지만, 아비뇽 교황과 로마교황 간의 정통성 시비가 붙고, 그 사이에 교황령 안의 여러 도시가 독립하기 시작했다.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교황청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브라만테(Donato Bramante)에게 베드로 성당을 더욱 크고 화려하게 증축하도록 했다. 브라만테는 십자형(✝) 평면에 거대한 돔을 얹은 성당과 원형 광장에서 성당으로 이어지는 대각선 통로와 오벨리스크는 마치 천국으로 가는 열쇠 모양(Ω)으로 설계했다.

피냐의 정원 솔방울 
라파엘로의 방

하지만, 건축비용 부족으로 교황청이 면죄부 판매를 시작하자, 뜻있는 신학자들은 베드로 성당의 엄청난 크기와 화려한 바로크풍, 사치스러운 장식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1415년 보헤미아 출신으로서 카를대학의 총장을 역임한 보얀 후스(Jan Hus)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다가 화형 된 것이 대표적인데도 바티칸의 세속화가 계속되자, 100년 뒤인 1521년 독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1796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교황령도 점령되었으나, 나폴레옹의 몰락 후 1815년 빈 회의에서 교황령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싹트기 시작한 이탈리아 민족주의는 1861년 3월 이탈리아 의회가 교황령의 로마를 수도로 결정했지만, 나폴레옹 3세가 교황령을 보호하고 있어서 이탈리아인들은 로마교황령을 통일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로 간주했다. 결국 1870년 7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기회를 틈타서 교황령을 흡수해버렸다.

아테네학당
성시스티나 성당
성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

멸망 상태였던 교황령은 1929년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교황청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교황 비오 11세와 라테란 조약(Lateran Treaty)으로 주권을 가진 독립국으로 인정하면서 로마교황령이 되살아나면서 교황은 로마 가톨릭의 정신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바티칸시국의 세속적인 통치자가 됐다. 바티칸시국의 영토는 성 베드로 대성당, 성 시스티나 성당과 궁전을 포함한 13개 건물 이외에 로마 동남쪽 약 120km에 있는 교황의 여름철 별장인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까지다.

베드로 광장 앞의 도로 위에 그어진 흰색 선이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구분 짓는 국경선인데, 로마 시내에서 지하철 A선을 타고 오타비아노 역(Ottaviano)에서 내리면 바티칸이다. 역에서 바티칸박물관까지는 550m, 도보로 약 7분 거리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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