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침략과 전쟁, 그리고 지배와 억압의 시대였다. 특히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동아시아의 근본적인 화해는 일본의 솔직한 역사 인식, 과거사 반성, 사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최근 마무리된 한·일 정상회담을 보며 뼈저리게 느낀 소회다.
한·일 정상이 마주했지만 기대보단 개탄스러운 재회였다. 지소미아(GSOMIA) 정상화, 셔틀외교 복원, 반도체 소재 수출 금지 해제 등 경제·안보 분야의 관계 회복 신호는 분명했다. 하지만 한·일 정상회담의 초점이었던 강제징용과 관련해 두 정상이 합의한 과거사 해법에 동의할 국민은 많지 않아 보인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사과는커녕 제3자 변제에 적극적인 참여 견해조차 밝히지 않았다.
가해 기업인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은 대위변제 기금 출연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뿐더러 신설 기금 참여 의사도 불분명한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은 오히려 이들 기업에 “구상권 행사를 상정하지 않는다”고 확약까지 해줬다. 어설픈 아마추어리즘과 망자존대(妄自尊大)의 상황 인식이 빚어낸 촌극이다.
윤 대통령과 정부의 이런 의지 덕분에 일본은 향후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독도 영유권, 신사참배 등 과거사 문제를 자신 있게 얼버무릴 기회를 얻었다. ‘지나가자, 과거는 다 끝났고 더는 꺼내지 말라’는 분위기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백기투항해버린 현실이 참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역사에 대한 반성은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는 것이다. 우리 국민이 일본에 많은 걸 요구하는 게 아니다. 과거 침략행위에 대한 진심 어린 반성, 그에 따른 실천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과 정부는 납득할 만한 사과나 법적·역사적 타당성 없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범국에서 보통국가로 전환하고자 역사를 염색하는 일본에 힘을 보태는 것으로 답했다. 이것이 윤 대통령이 그토록 자신했던 국익 최우선 외교이며 미래 지향의 새로운 한·일 관계를 정립할 최선책이었는지 따져 묻고 싶다.
정직이라는 큰길을 앞에 두고도 샛길에 눈 돌리며 제자리를 맴도는 윤 대통령과 정부에 들려주고픈 말이 있다. 독일의 정치사회학자 클라우스 오페가 전범국 일본을 향해 던진 일갈이 그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슬픈 것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건 자학이 아니라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