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메디치가는 정치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권위가 있는 교황청까지 넘봤다. 1513년 메디치가 출신이 교황 레오 10세(1475~1521)가 되었고, 교황 레오 10세의 사후에는 메디치가 출신인 클레멘스 7세(1523~1534)가 그의 뒤를 이었다. 메디치가는 3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는 등 유럽 역사를 장식하더니, 마침내 1569년 메디치가의 방계인 코시모 1세(CosimoⅠ: 1519~1574)가 토스카나 대공 작위를 받고 피렌체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은 1494년부터 1559년까지 66년 동안 8차에 걸친 프랑스 샤를 8세와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와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그동안 안정되어 있던 이탈리아의 소국들의 세력균형이 깨지고 전란의 시기를 맞으면서 사보나롤라의 신정 혁명으로 코시모 메디치가도 단절되었다. 이후 피렌체 재집권에 성공한 코시모 3세(1642~ 1723)에게는 두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세 자식 모두 후사를 보지 못해서 메디치가가 단절되었다.

장남 페르디난드(1663~1713)는 방탕한 양성애자로 문란한 성생활로 생식 능력을 잃었고, 차남 잔 가스토네(1671~1737)도 부인인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안나 마리아를 혐오하고, 동성애자인 줄리아뇨 다미의 품에 파묻혀 살았다. 장녀이자 유일한 딸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1667~1743)는 세 자녀 중 가장 총명하고 모범적이어서 부모의 총애를 받으면서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과 결혼했지만, 남편을 통해 매독이 옮아 첫 아이를 유산한 후 임신하지 못했다. 안나가 피렌체로 돌아온 1716년에 장남 페르디난드는 이미 죽었고, 차남 잔 가스토네는 줄리아노 다미와에 파묻힌 상태에 알코올 중독자여서 코시모 3세는 후계자로 안나를 점찍었다.
1713년 코시모 3세와 토스카나 의회는 안나를 후계자로 선언했으나, 열강의 반대로 무산되고 로렌(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슈테판이 후임 대공으로 내정되었다. 코시모 3세는 후계자 선정 문제에 실패한 뒤 1723년 81세로 죽었다. 173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안나 마리아 루이사에게 섭정 직위를 제안했으나 거절했다. 메디치가의 마지막 후계자 안나는 1743년 메디치가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피렌체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메디치가에서 기증된 예술품들은 오늘날 피렌체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우피치 미술관의 콜렉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피렌체는 1807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여동생 엘리자 보나파르트를 피렌체 공작으로 삼았으나, 나폴레옹 몰락 후 빈 회의에서 합스부르크 페르디난드 3세가 다시 토스카나 대공이 됐다. 1865년 토스카나주는 국민투표로 통일 이탈리아에 편입되고,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가 6년 후인 1871년 수도는 로마로 이전했다. 약 700년간 피렌체 공국의 수도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1982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이어서 토스카나주의 피사 대성당(1987), 산 지미냐노 역사 중심지구(1990), 시에나 역사 중심지구(1995), 피엔차 역사 중심지구(1996), 오르챠 계곡(Val d'Orcia: 발 도르챠)(2004), 메디치가의 빌라와 정원(2013) 등 7개 지역이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피렌체에서 바로크 시대(Baroque)를 대표하는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 1640)의 ‘한복을 입은 남자’라는 드로잉화(drowning)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크란 16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 발달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미술을 의미하는데, 지금의 벨기에 지방인 플랑드르 출신 루벤스가 언제 그렸는지 알 수 없는 ‘한복을 입은 남자’가 1983년 11월 29일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드로잉화 경매 사상 최고가인 32만 4000파운드에 팔려서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이 그림은 1997년 미국 석유 재벌 '폴게티'가 다시 127억 원에 사들여서 또다시 화제가 되었는데, 현재 캘리포니아 폴게티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루벤스가 피렌체와 로마에서 활동하던 1600년~1608년경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끌려갔다가 서양 상인에게 팔려 간 조선인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무렵에 알려진 조선인은 일본에 포교차 왔다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종군하여 여행기를 남긴 이탈리아 출신 까를레티 신부(Carletti)가 “나의 세계일주기”라는 여행기에서 밝힌 ‘안토니오 코레아(Antonio Corea)’가 있는데, 카를레티 신부는 “일본 해안에서 수많은 조선인이 헐값으로 매매되는 것을 보고 12스쿠디(scud)를 주고 5명을 사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귀국길에 인도 고아(Goa)에서 네 명을 풀어주고, 한 명을 피렌체까지 데리고 와서 풀어주었는데, 로마에서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루벤스가 피렌체나 로마에서 머물렀던 때 그를 만났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안토니오 코레아가 드로잉화의 주인공인지는 불분명하다.
사실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코레아 씨 약 300명이 로마 남쪽 600㎞에 있는 알비시(Albi)에 살고 있는데, 알비시에서는 1989년 8월 한국인과 이탈리아인의 만남을 상징하는 기념비 ‘평화의 만남’을 세웠다. 또, Corea라는 지명이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지역과 피렌체에서 가까운 리보르노에도 있으며, 특히 남부 칼라브리아 지방은 일찍이 바다를 통한 교역이 활발했기에 혹시라도 이들이 국제무역이 활발하던 고려시대의 무역선이 지중해에 도착하여 정착한 고려인이 아닐까 하는 반론도 있다.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남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청나라나 외교사절이라는 반론도 있다. 조선인이라고 한다면, 선비 차림은 분명하지만, 갓과 망건은 유럽에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상상의 날개를 펴고 국내의 어느 소설가는 ‘베니스의 개성상인’이라는 소설을 펴내기도 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