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장진영을 추억하며

  느린 작업실 602호  

위암 투병 중이던 지난 2009년 9월 1일 서른 여덟 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故 장진영. 1993년 미스코리아 대전·충남 진으로 얼굴을 알린 장진영은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단순히 예쁜 여배우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연기력까지 인정받았다. ‘국화꽃 향기’를 남기고 ‘푸른 제비’가 되어 ‘무지개 너머’로 떠난 그녀의 작품을 되짚어 본다.

 

#1. 레슬링, 세상을 팽개치다

반칙왕(2000)

무기력하게 살던 소심한 은행원 대호(송강호)는 퇴근 후 ‘반칙’ 전문 프로레슬러로 변모하면서 펼쳐내는 인간사를 싸늘한 블랙유머로 가득채운 이 작품에서 장진영은 대호가 다니는 체육관장의 딸로, 주인공 대호에게 맹훈련을 시키는 교관 역을 맡아 당찬 매력을 선보였다. ‘넘버3’를 통해 대중들에게 강한 임팩트를 남긴 송강호의 단독 주연작으로 화제가 됐지만, 송강호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장진영이 영화계의 주목을 받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2. 피보다 진한 ‘슬픈 공포’

소름(2001)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악령도, 미쳐 날뛰는 연쇄살인마도 없지만 냉랭하고 서늘한 분위기의 슬프지만 섬뜩한 공포가 흐르는 이 작품에서 아이를 잃어버리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선영 역을 맡아 초췌하고 피폐한 인물을 연기했다. 짧은 커트머리에 공허한 눈빛과 멍투성이의 망가진 얼굴로 줄담배를 피워대는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장진영은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은 물론 포르투갈 판타스포르토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평가받았다.

 

#3. 순수한 사랑, 아름답지 아니한가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 2002)

교통사고로 인한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의 사랑하는 ‘그녀’를 찾아주려 애쓰는 여자. 사랑영화면서 그 흔한 키스신 하나 없는 무지개빛 수채화 같은 이 작품에서 장진영은 사진 뒷면에 메모된 ‘94 햇살의 흔적’ 하나를 단서로 삼아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사랑되찾기’에 나선 지하철 유실물센터 직원 연희 역을 맡아 사내아이 같은 면모에 여성스러움을 함께 드러내는 풋풋함을 선보이며 주연급 여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4. 그녀의 머리에서 국화꽃 향기가 났습니다

국화꽃 향기(2003)

김하인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인과 그녀에 대한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린 멜로영화. 장진영과 박해일은 대학 선·후배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르나 끝내 죽음의 신의 질투로 이별하고야 마는 운명적 커플 역을 믿음직스럽게 소화해냈다.

어떤 역할을 맡겨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장진영과 충무로의 떠오르는 재목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박해일의 순도높은 멜로연기로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이 영화의 OST로 연인을 잃은 남자의 절절한 마음이 담긴,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만든 발라드 ‘희재’는 성시경이 불러 많은 인기를 얻기도 했다.

 

#5. 당당한 싱글들의 쿨한 사랑찾기

싱글즈(2003)

카마타 토시오의 소설 '29세의 크리스마스'를 원작으로, 스물아홉살 동갑내기 직장여성의 사랑과 우정을 과장없이 그려 여성 관객들의 호응을 받은 영화 ‘싱글즈’.

애인에게 차이고 직장에서는 좌천당해 우울하기 그지없는 29세 디자이너 나난 역을 맡은 장진영은 그 또래라면 누구나 겪을법한 위기감과 갈등을 군더더기 없는 연기로 소화해 내며 제24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다시 한번 거머쥐게 된다. 장진영, 엄정화, 이범수, 김주혁 등 네 명의 배우들이 떠받친 영화는 누구 하나 처지지도 튀지도 않게 균형을 잡아주며 각자의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관객들의 시선을 모았다.

 

#6. 창공을 운명처럼 가르는 ‘푸른 제비’

청연(2005)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비행사(당시 제작사는 그렇게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가 권기옥 지사) 박경원의 일생을 그린 영화로 승승장구하던 장진영의 커리어에 큰 타격을 입힌 작품.

100억 이상을 쏟아부은 블록버스터에 여배우로는 드물게 원톱으로 나선 장진영은 엄청난 애착을 가지고 촬영에 임했지만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친일파 논란에 휩싸여 관객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다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해선 언론과 평단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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