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건물 위로 내린 흰 눈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20년을 이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는데 순식간에 물거품이 됐어요. 아무것도 나한테 남은 게 없어요. 대목 앞두고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는데….”

적막과 함께 아름다운 눈꽃이 내리던 22일 밤 11시경 충남 서천의 수산물특화시장에 화마(火魔)가 덮쳤다. 수산물동 1층 점포에서 스파크가 튀면서 시작된 불은 강한 겨울바람에 속절없이 번졌고 시장 내 점포 292개 가운데 수산물동, 일반동 등 점포 227개가 전소됐다. 9시간 넘는 진통을 앓던 특화시장이 전통과 함께 무너져 내린 것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대목을 앞두고 있던 상인들은 날벼락을 맞았고 이들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에 큰 인심피해(人心被害)가 발생했다. 

 

[르포]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

시장 292개 점포 중 227개 전소
“불로 20년 생업 잃어…생계 막막”
尹 대통령 얼굴만 비추고 돌아가

영상=충남소방본부 제공

23일 낮 12시 50분경 불이 꺼진 현장에 순백의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눈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해한 모습으로 특화시장의 상처를 지우고 있었다. 코를 뚫고 들어오는 매캐한 탄내만이 화재 현장임을 증명해 줬다. 그제야 까맣게 그을리고 탄 특화시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목적을 잃고 널브러진 철골 구조물과 노란색 출입 통제선이 서서히 보였다.

화재로 피해 본 상인들은 인근 먹거리동 2층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하루아침에 생계를 잃고 막막해진 상인의 공허한 눈동자가 서로를 비췄다. 갈 곳 잃은 처지에 의지할 곳이 서로밖에 없다. 대비책을 기다리는 이들 사이에서 하소연과 울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 대목이라 건어물을 많이 들여놨는데….” 22일 밤 11시 8분경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에서 불이 나 점포 227개가 탔다. 불은 인명 피해 없이 9시간 만에 완전히 진화됐다. 수산물동과 식당동, 일반동 내 점포가 모두 소실됐다. 검게 그을린 건물에 쌓인 흰 눈이 상인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연합뉴스
“설 대목이라 건어물을 많이 들여놨는데….” 22일 밤 11시 8분경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에서 불이 나 점포 227개가 탔다. 불은 인명 피해 없이 9시간 만에 완전히 진화됐다. 수산물동과 식당동, 일반동 내 점포가 모두 소실됐다. 검게 그을린 건물에 쌓인 흰 눈이 상인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연합뉴스

수산물시장 상인 A 씨는 붉어진 눈으로 “설 전에 문자로 전국에서 예약 주문이 밀려 들어와 선수금을 받은 상태다. 생선도 미리 말려놓으려고 반건조장에 널어놓고…. 설맞이 준비하고 퇴근한 건데 다 타버리고 재가 쌓여서 전부 쓰레기가 돼버렸다”라고 하소연했다.

피해를 본 건 수산물시장만이 아니었다. 잡화 점포 등 일반동에서 장사하던 상인도 마찬가지였다.

일반동 상인 B 씨는 “당장 내달부터 걱정이다. 상인은 장사해야 생계를 유지하는데 다 불에 타버리고 남은 게 없으니…. 말로는 시장 주차장을 이용해서 장사를 다시 하게 해준다는데 그러면 방문 손님은 차를 어디에 주차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22일 밤 11시경 화재로 불탄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 모습.
22일 밤 화재로 불탄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 모습.

이어 “김태흠 충남지사는 건물 철거하고 재건축하는 기간을 1년 정도로 잡고 말씀하시는데 공사도 해봐야 아는 거 아닌가 싶다. 실제 그게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확실한 게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생계를 잃어버린 상인은 그 동안 무엇을 해 먹고 살아야 하는지 막막하다”라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삼키며 말했다.

그러면서 “화재 피해가 발생한 수산물동, 일반동만 생계가 막막해진 게 아니다. 채소든 과일이든 연기를 먹고 재가 쌓여 농산물동도 피해를 봤다. 수산물 사러 왔다 채소도 사는 손님이 많은데 모두 다 막막한 심정이다”라고 덧붙였다.

넋을 잃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 침묵만이 상인을 위로하는데 바깥에서 울분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대통령님, 사진 찍으러 온 겁니까?" 23일 오후 화재 피해를 당한 서천특화시장 일부 상인들이 "시장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정작 피해 상인들에게 한 마디 위로나 어떠한 발언도 없이 사진만 찍고 갔다"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통령님, 사진 찍으러 온 겁니까?" 23일 오후 화재 피해를 당한 서천특화시장 일부 상인들이 "시장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정작 피해 상인들에게 한 마디 위로나 어떠한 발언도 없이 사진만 찍고 갔다"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니 얼굴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불구경하러 온 것도 아니고 왜 그냥 가는 거예요! 대통령님 오신다 해 잠도 못 자고 오전 7시부터 기다렸는데. 적어도 피해 상인 얼굴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한 상인이 울부짖자 옆에 있던 피해 상인도 하나둘씩 거들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2층에 붙들려 있던 상인들이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출입문은 다수의 경호원이 막고 있었다.

“이쪽으로는 못 나갑니다. 뒷문으로 돌아 나가세요.”

왜 못 나가냐 소리치는 상인에게 경호원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책을 말해주겠다던 이들은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고 막무가내로 문을 봉쇄한 경호원에 상인은 울며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밖에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치는 눈보라를 타고 울분이 흩어졌다. 특화시장과 달리 길거리는 새하얀 도화지처럼 깨끗했다. 점이라도 찍힐 줄 알았던 백지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뭉뚱그린 발도장보다 구체적인 대책이 필요한 때, 적재적소에 맞는 정부의 지원안이 그려지길 기대한다.

글·사진=김동은·김세영 기자 ksy@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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