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니스트·문학박사
최근의 혼란스러운 시국을 맞이하여 우리 충청지역 선배 문인들은 당시의 난국을 어떻게 수습하고 극복했는지 문학산책을 통해 그들의 지혜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고려말 조선초 문무를 갖춘 대학자, 문학인, 관료, 혁명가로서 조선 개국의 주역이었던 삼봉 정도전을 문학산책하고자 한다.

◆ 정도전의 생애
정도전(1342~1398)은 자는 종지, 호는 삼봉, 시호는 문헌이며, 고려말과 조선초에 문무를 갖추고 민본정치의 길을 열어놓은 위대한 대학자이며 혁명가이다.
정도전은 1342년(충혜왕 3)에 당시 홍복판관으로 재직하면서 청백리로 이름을 떨친 아버지 정운경과 산원 우연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 1녀 가운데 맏이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당시 유학자로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권근, 이숭인, 윤소종 등과 공부하였다.
정도전은 1363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주사록에 오른 뒤, 성균관 태상박사 등을 지냈으나, 1375년에는 친원배명정책을 반대하다가 전라남도 나주 회진현으로 귀양을 갔다. 나주에서 다양한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백성을 위한 새로운 왕조 열기 구상을 하였다.
1377년 귀양에서 풀려나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383년 함주에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 친분을 맺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고, 조선 개국 일등 공신이 되었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했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을 짓는 등 여러 방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에 정도전은 왕위 세습과 왕권 강화를 위한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어 역적으로 몰려 죽고 말았다. 정도전은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며 재상 중심 체제를 지향하려는 정치이념을 펼쳤지만, 실권을 잡고 있던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 왕조 국가를 지향하면서 서로 마찰을 빚은 것이다.
정도전이 남긴 저서로는 조선의 문물제도와 국가정책 등 조선 법률의 바탕을 이룬 『조선경국전』과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존중하는 민본정치의 지침서가 된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등이 있다. 또 최초의 성리학 입문서로 평가되는 『학자지남도』를 남겼고, 『불씨잡변』을 비롯하여 『심문천답』, 『심기리편』 등에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아 성리학의 시대를 열었다. 이밖에도 문학적인 소질과 정치 경제 등 다방면의 재능을 보여 준 문집 『삼봉집』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겨 그가 결코 권력에만 눈이 먼 정치가가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애국 제민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유학자로서 투철한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새 시대 새 왕조를 열고자 선도적 역할을 한 인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정도전의 사상과 업적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한고조(유방)가 자방(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했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것을 유방과 장량의 관계에 빗대어 말하곤 했다. 조선 건국의 혁명 주동자인 이성계를 움직여 조선을 새로운 왕조로 만든 인물은 바로 정도전 자신이라는 자긍심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개국 일등 공신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후에는 ‘역적’으로 몰렸다. 건국의 일등 공신이 조선왕조 말기인 고종 때에 와서야 경복궁을 중건하던 대원군에 의해 겨우 신원되었다.
정도전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조선 개국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정몽주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이성계 일파의 이른바 ‘역성혁명’을 결사코 반대하고 기회를 타 이방원 일파를 척결하고, 고려왕조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정몽주는 왕권 강화의 필요성에 따라 조선왕조에서 일찍이 충신의 반열에 오른 반면, 고려왕조를 교체하고 조선왕조의 개국에 가장 크게 공헌한 정도전은 오히려 역적으로 처단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인 것이다.
고려 후기 성리학을 이상으로 한 사대부는 성리학의 이념으로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질서를 지향했던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무너지는 고려를 지키며 당면한 현실을 타개하려는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과, 무너지는 고려를 부정하고 새 왕조를 세우려는 조준, 정도전, 윤소종 등으로 갈렸다. 편의상 전자를 ‘고려 수구파’라 하고 후자를 ‘조선 개국파’라 칭한다.
정몽주 중심의 고려 수구파는 혈연을 매개로 하는 가족 중심의 인간관계를 중시하였다. 반면에 정도전 중심의 조선 개국파는 성리학을 통해 국가의 공적인 관계와 사회적 명분을 중시했다. 이들은 특히 『춘추』에서 강조한 “대의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 앞선다”라는 명분을 선으로 내세우면서, 사적인 인정에 치우치는 것을 악이라 간주하며 공적 의리를 중시했다.
또 고려 수구파는 절대적인 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처럼 절대 불변의 인간관계로 영원하고 변경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말의 많은 문제점을 알면서도 그들은 결국은 고려를 버리지 못하고 충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조선 개국파는 성리학의 대의명분에 충실했다, 군주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합치할 때만 정통이며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충은 우매한 왕까지도 받들라는 개념이 아니라 왕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대하는 것을 신하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유교의 천명사상이요 맹자의 역성혁명론이다. 왕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와 고려왕조를 부정하는 논리가 여기에서 출발했다.
조선 개국파 정도전은 이밖에도 “백성은 먹는 것이 하늘이다”라고 생각하고 농업을 근본으로 백성들이 잘 사는 토지개혁을 추구했다. 불합리한 차경제를 개혁하여 공전제와 균전제를 실현하여 자영농을 늘리고자 했다. 또 세금을 공정하게 부과하는 개혁을 하고, 의창제와 혜민전약국 운영을 통한 빈민 질병 구제와 후생 복지에도 힘썼다.

◆정도전 단양 문화유적
강원도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물줄기는 충청북도 단양으로 흘러들어 단양 곳곳을 굽이치다가 도담삼봉을 형성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삼봉 정도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운경이 젊었을 때 어느 관상가를 만났는데, 관상가는 정운경이 10년 뒤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이 말을 믿은 정운경은 10년간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하고 고향인 봉화로 돌아오던 길에 단양 삼봉에 이르러 어느 초가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정운경은 이곳에서 우씨 여자를 만나 정을 나누게 되었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곧 정도전이다. 그는 관상가의 예언대로 훗날 재상이 되었다.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한 것은 단양 삼봉을 가리키는 것이고, 도전이라는 이름은 길에서 얻었다는 뜻이다.
또 전설에 의하면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삼봉산이 홍수에 떠내려오다 단양에 멈췄다고 한다. 그래서 정선에서는 매년 단양에 와서 세금을 거두어 갔다. 그러던 어느 해 어린 정도전이 세금을 거두러 온 정선 관리에게 말했다.
“올해부터는 세금을 내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남의 땅에 있던 소중한 산을 차지하고도 돈을 안 내겠다고?”
“우리가 도담삼봉에게 정선에서 떠내려오라고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금을 낼 수 없으니, 도담삼봉이 그렇게 소중하면 도로 가져가시지요.”
이후로 단양은 정선에게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만큼 정도전은 어렸을 때부터 민본에 충실하였고 지혜와 슬기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도도히 흐르는 남한강 중간에 우뚝 선 단양 도담삼봉을 감상할 수 있는 도담삼봉 동산에는 이곳 단양에서 태어나서, 유년 시절 도담삼봉에서 학문연구에 정진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웅지의 꿈을 키웠던 삼봉 정도전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그 동상 뒤편에는 ‘삼봉 정도전 선생 숭덕비’와 함께 그의 시비 2기가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하나는 가을 경치를 한 폭의 그림처럼 노래한 「김거사의 들집을 찾아가며」라는 한시 비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왕조의 개국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라는 「선인교 나린 물이」라는 시조 비이다. 인걸은 없고 시비와 동상만 남아 무상하다.
가을 구름이 넓고 넓어 온 산이 텅 비었네
잎은 소리없이 떨어져 온 땅을 붉게 물들이네
말을 개울 다리 위에 세워두고 돌아갈 길을 물으니
이몸이 그림속에 있는지 알지 못하네
-정도전, 「김거사의 들집을 찾아가며」, 한시 비
선인교 아래로 내리는 물이 자하동으로 흘러가니
오백 년 화려했던 고려왕조가 물 소리 뿐이로구나
아이야, 고려가 흥하고 망한 것을 물어서 무엇하겠느니
-정도전, 「선인교 나린 물이」, 시조 비




도담 삼봉이 정도전과 깊은 인연이 있었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