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화’란 명분 아래 국가 폭력 겪어
 세월 흐른 지금까지도 그 시절 악몽 꿔
 공식사과 원하나 대전시 침묵으로 일관
“함께 진실 밝혀야” 피해자 연대 호소

<속보>=대전 성지원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지만 실상은 감금과 폭력이었다.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길 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끌려가 부랑자가 됐고 그곳에서 청춘과 존엄을 빼앗겼다. 정한영(61) 씨는 그 지옥을 살아 나온 생존자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악몽 속에서 맞고 기합을 받는다. 그리고 이제 그 상처가 끝나지 않았음을 증언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본보 9월 10일자 1면 등 보도>

정한영 씨.
정한영 씨.

◆이름 대신 새겨진 낙인

1984년 가을 쯤 그는 병무청 신체검사 통지서를 손에 쥔 채 대전에 머물고 있었다. 친구의 면회를 따라 파출소에 들른 것이 불운의 시작이었다. 신분증을 분실했다는 대답은 곧장 수갑으로 이어졌다. 의자에 묶인 채 조금 뒤 회색 탑차가 나타났다. 목적지는 성지원이었다. 기록에는 ‘볼펜 강매’라 적혔지만 그것은 허위였다. 그날 이후 정 씨는 이름이 아니라 낙인으로 불렸다.

“기차역에서 졸다가 끌려온 사람도 있었고 고등학교 교사도 잡혀왔습니다. 이유가 없었어요. 같은 국민인데도 부랑자라는 이름으로 묶여 수용됐죠. 이름 대신 낙인이 붙는 순간 그 사람 인생은 국가가 만든 울타리 안에서 사실상 지워졌습니다.”

성지원에 들어선 순간 그는 부랑인으로 낙인찍혔다. 붙잡힌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난하거나 길거리에 있었다는 이유, 혹은 운이 나빴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했다. 국가는 ‘사회 정화’를 명분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었다. 그 낙인은 몸에 새겨진 상처보다 오래 남아 정 씨의 청춘을 삼켰다.

“사회와 등을 지게 된 거죠.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지금도 꿈속에서 기합을 받고 두들겨 맞는 장면을 봅니다. 한 번은 잠결에 베개를 들고 기합 자세를 했다고 아내가 말해주더군요. 그만큼 과거의 폭력은 몸속에 각인돼 아직도 무의식 속에서 나를 지배합니다.”

◆제도로 포장된 폭력의 책임

성지원은 결코 우연히 존재한 시설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1980년대 내무부 훈령 10호가 있었다. 부랑자 수용을 제도화한 이 훈령은 행정 편의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시민을 언제든 길에서 잡아갈 수 있게 했다. 보호가 아니라 통제, 복지가 아니라 노역이었다. 제도라는 이름의 그물은 너무도 거칠었고 결국 무고한 이들이 대거 걸려들었다.

“내무부 훈령 10호 때문에 잡혀들어온 사람이 엄청납니다. 가족이 있어도 돌려보내지 않았죠. 저도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줬는데 연락조차 하지 않았더군요. 결국 국가의 큰 잘못입니다. 행정 편의라는 이름 아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최소한의 권리마저 무참히 끊어버린 겁니다.”

훈령이라는 단어는 서류 위에서는 그저 지침에 불과했지만 현장에서는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칼날이었다. 그는 그 칼날에 베인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죄도, 잘못도 없었다. 단지 권력의 의지가 그들을 ‘부랑자’로 규정했을 뿐이었다. 국가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버려진 사람으로 남겨졌다.

“애먼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훈령으로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간 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입니다. 누군가는 그 시절을 잊으려 하지만 피해자에게 그 잘못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죠. 상처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매일의 삶을 갉아먹는 그림자가 돼 따라붙고 있습니다.”

대전성지원에 감금돼 있을 당시 정한영 씨의 신상기록카드. 본인 제공
대전성지원에 감금돼 있을 당시 정한영 씨의 신상기록카드. 본인 제공

◆잊으면 반복되는 공포

세월은 흘렀지만 성지원의 그림자는 여전히 정 씨의 삶을 지배한다. 탈출 이후에도, 결혼을 하고 나이 든 지금에도 그날의 기합과 구타는 악몽처럼 되살아난다. 그리고 최근 그는 그 그림자가 다시 길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이 터졌을 때 아차 싶었습니다. 잘못하면 성지원 같은 일이 또 벌어지겠구나 불안감이 찾아오더군요. 국가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제도화되는 순간 그날의 공포는 언제든 우리 삶을 다시 뒤덮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순간 과거의 악몽은 다시 현실로 변한다. 정 씨가 젊은 이들이 성지원 같은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 까닭이다. 무지와 무관심은 언제든 역사를 반복하게 만든다. 그의 증언은 개인의 고통을 넘어 사회 전체에 던지는 경고다.

“우리 처남도 부랑자들 잡혀간다니까 ‘거길 왜 갔냐’고 하더군요. 설명을 해주니 깜짝 놀랐습니다. 젊은 세대도 이런 역사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과 없이는 끝나지 않는 상처

정 씨가 바라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이미 잃어버린 청춘과 건강, 평생의 상흔은 어떤 방식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직접 사과하는 것이다. 사과 없는 책임은 공허하고 지원 없는 위로는 기만일 뿐이다.

“큰 걸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국가와 대전시가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달라는 겁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상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피해자와 유가족의 눈물을 닦아주길 바랄 뿐이죠. 그 사과 한마디야말로 잃어버린 세월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작일 겁니다.”

부산에서 있었던 형제복지원, 경기에서 있었던 선감학원 사건은 피해자 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생활·의료 지원이 시작됐다. 하지만 성지원이 있던 대전은 지금까지 아무런 제도적 움직임이 없다. 피해자들은 호소하지만 행정이 귀를 닫고 있어서다. 침묵은 곧 외면이었고, 외면은 또 다른 폭력이 됐다.

“국가도, 시도 모르쇠입니다. 피해 사실이 분명한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요.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보상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입니다. 외면이 길어질수록 침묵은 새로운 폭력이 돼 피해자들의 상처를 더 깊게 파고듭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개인의 호소가 아니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싸워야 한다’는 다짐 속에서 정 씨는 성지원 피해자들의 연대를 호소했다. 그는 뜻을 함께할 이들의 연락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성지원은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집단의 상처이며 외면하면 반복될 사회적 비극이기 때문이다.

글·사진=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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