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섭 취재2부 차장

국가와 지자체가 과거사에 대해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피해자 개인의 구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한 사회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자 동시에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방식이다. 잘못을 기록하고, 잘못을 사과하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단죄를 넘어 미래를 담보하고 기약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2003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던 장면은 그 의미를 보여준다. 국가 최고 권력이 처음으로 공권력이 국민에게 가한 폭력을 인정했던 순간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반세기 넘도록 강요된 침묵 속에서 끈질기게 싸워온 이들의 노력 끝에 비로소 국가의 언어로 확인된 진실이었다. 그 한마디 사과는 피해자들에게는 존엄 회복의 출발점이었다. 우리 사회에는 민주주의가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체계임을 보여주는 역사적 전환점이기도 했다.

성지원 문제 역시 같은 맥락 위에 있다. 피해자들의 상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침묵하고 지자체는 눈치를 본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사건이 과거에 묶이는 것은 아니다. 국가와 지자체가 외면하는 한 우리 사회는 또 다른 성지원을 방치할 수 있다는 불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책임 있는 사과와 제도적 대책은 피해자 개인을 위한 최소한의 구제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 전체를 향한 선언이다. 다시는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다짐이자 민주주의가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강화해가는 과정이다. 과거를 마주하지 않는 사회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의 역사를 통해 확인해왔다.

그러나 성지원이 놓인 현실은 다르다. 정부는 침묵하고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피해자 조사 제도화와 구제 신청 없는 보상·재활 지원을 권고했지만 종이 위에 멈춰 있다. 대전시 역시 다르지 않다. 조사도, 대책도 없다. 피해자는 늙어가는데 응답은 없다.

문제는 복잡하지 않다. 정부가 하지 않는다면 지자체라도 해야 한다. 피해가 발생한 곳은 대전이고 피해자들은 지금도 살아 있다. 정부가 나몰라라 하면 시에서라도 먼저 사과하고 조사하며 지원책을 내놔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책임이다.

하지만 상황은 아이러니다. 성지원을 운영했던 사회복지법인 천성원은 문을 닫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종합병원과 장애인학교를 운영하며 성장했다. 피해자의 시간은 멈췄는데 가해 구조는 더 단단해졌다. 정의가 지연되는 사이 불의는 체질이 됐다.

과거는 끝나지 않았다. 침묵은 방관이 아니다. 또 다른 폭력이다. 국가와 지자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책임을 인정하고 진실을 기록하며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 그것은 피해자에게 최소한의 구제이자 우리 사회에는 재발 방지의 울타리다. 늦었지만 답해야 한다. 책임을 외면하는 건 또 다른 성지원을 방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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