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동 두계천길 걷기 (with 23번)
그렇다. 그곳에서 수달을 만났다. 눈빛도 교환했다. 여름엔 반딧불이도 만날 수 있는 청정지역이다. 영화 클래식에서 그들이 반딧불이를 만난 곳이다. (물론 영화 속 반딧불이는 CG겠지.) 그래서일까, 그 길을 걸으면 그곳만의 BGM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사랑하면 할수록/반딧불이/강가에서, 델리스파이스 고백, 김광석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이규석의 기차와 소나무. 호남선 기차가 바로 옆으로 지나가지만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이 있다. 대전 서구 원정동은 클래식 촬영지가 유명해지면서 마을도 함께 힐링여행지로 입소문이 났다. 원정동에 가면 원정역이 있고 두계천도 있고 클래식 촬영지도 있고 위왕산도 있고 폐교도 있고 동춘당 송준길 묘도 있고 수달도 있다. 23번 버스 타고 무도리종점(원정동)으로 간다.

대전 초록버스 여행
EP1. 노루벌길엔 ○○이 있다 (with 25번)
EP2. 두메마을과 찬샘마을 (with 71번)
EP3. 대전별서에서 하룻밤 (with 52번)
EP4. 원정동 두계천길 걷기 (with 23번)
#1. 무도리
무도리는 서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23번 종점이다. 가수원동, 흑석동, 용촌동을 지나 원정동으로 간다. 가수원에서 25분이면 종점이다. 대전과 계룡 접점이다. 이 접점의 중심은 두계천이다. 계룡 신도안에서 시작되는 두계천은 대전 용촌동에서 갑천과 합류한다. 지도를 보면 호남고속도로 아래를 막 지나 계룡을 벗어난 두계천은 크게 휘돈다. 남쪽으로 확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데 여기서 두계천이 품은 마을이 무도리다. 왠지 무협소설에 나올 것 같은 이름이지만, 아니다. 두계천이 이 마을을 휘돌아 흐른다 해서 그리 부른다. 물돌리→물도리→무도리가 되었다고 한다.

평화로운 무도리들에서 걸음을 시작한다. 왼쪽은 무도리들 오른쪽은 두계천이다. 차도 다니지만 통행이 많지 않아 걷기 좋다. 자전거 애호가들에겐 오래전부터 유명한 힐링코스다. 이곳엔 친절한 이정표가 많다. 10여 분 걷자 나타난 이정표. ←계룡대 10.7㎞, 갑천 4.7㎞→. 이정표 뒤로 포스가 심상찮은 봉우리가 보인다. 위왕산이다. 호남선 기차나 호남고속도로를 타다 보면 계룡과 대전 경계쯤에 보이는 우뚝 솟은 봉우리, 위왕산이다. 그 아래 두계천이 있고 무도리마을이 있다.

#2. 위왕산
신도안에 자리하는 임금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위왕산(衛王山) 혹은 위왕산(爲王山)으로 불린다. 신도안 부근 모든 산들이 신도안을 향해 굽히고 있는 모습인데 위왕산만 신도안을 등지고 있다. 호위대장이 말을 타고 외곽을 경비하는 형태다. 이와 반대로 신도안 반대방향을 바라본다고 해서 어긋날 위(違)를 써서 위왕산(違王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토라져 돌아앉은 모습보다는 충직한 포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높진 않지만 정상(257m) 뷰도 압권이다.
살짝 올라갔다 오기로 했다. 철길을 앞에 두고 왼쪽 길로 접어든다. 길 따라 가다보면 공사중인 평창산단 지원도로 옆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 20여 분이면 정상이다. 장쾌한 조망이 기다리는 곳이다.

무도리마을을 휘감고 돌아 흐른 두계천이 위왕산 앞에서 다시 휘돌아나간다. 물길 위로 기차가 지나가고 63번 버스가 지나간다. 그 옆엔 평창산단으로 이어지는 도로 공사가 마무리단계다. 짙은 물빛과 그 위를 오가는 백로들이 수묵화를 완성한다. 물 한 모금. 바위 위에서 풍경을 만끽한다. 날씨가 좋아 다행이다. 햇살도 풍성하다. 봄이 가까이 왔나보다. 살짝 봄냄새도 난다.
#3. 원정역
짧은 산행 뒤 두계천을 따라 걷는다. 위왕산을 뒤로하고 걷는데 23번 버스가 들어온다. 위왕산과 초록버스를 함께 사진으로 담는다. 왼쪽 철길에 기차까지 함께였다면 더 좋았을텐데….


이럴수가, 1분 뒤 빨간색 새마을호 하행선이 온다. 아쉬움 한 스푼 남기고 걷는다. 곧 원정구름다리를 만난다. 육교를 건너 마을길을 걷는다. 200년 된 느티나무와 하이파이브 하고 원정역 쪽으로 간다. 1970년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원정역. 기차가 서지않는 폐역이다.
1955년 12월 1일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원정역은 1970년 8월 역사를 신축하고 보통역으로 승격됐다. 1984년 무배치간이역이 됐고 2004년 7월 여객업무를 중단한 뒤 2006년 6월 23일 폐지됐다. 충청권 광역철도 1단계 구간에 포함되지만 정차하진 않는다. 관광자원이 쏠쏠한 곳인데 정차역이 되면 좋겠단 바람이다.

마침 대전시도 원정역 활용 방안을 구상, 추진 중이다. ‘철도도시 향수 담은 근대역사 원정역 매입·활용 추진’ 안에 따르면 대전시는 코레일과 협의해 역사를 매입, 복원할 계획이다. 리모델링 등 공사를 거쳐 복합공간으로 조성한다. 내년 말 거듭날 원정역이 기대를 품게 한다. 원정역 활용 사업은 철도도시 대전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서남부권 자연친화 힐링공간을 확대할 것이다. 지금도 발길이 많은 원정역이 더 많은 이들이 찾는 ‘핫플’이 될 전망이다. 충청권 광역철도가 원정역에서도 정차하길 바라는 더 큰 이유다.

#4. 송준길 묘 가는 길
원정역 근처에 커다란 이정표가 보인다. ‘송준길 선생의 묘 ←1.5㎞’ 원정동 올 때마다 갈까말까 망설이다 결국 안 간 곳. 이번엔 굳은 맘 먹고 걸음을 옮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데로 가다보면 또다른 커다란 마을보호수를 만난다. 그 옆길로 살짝 빠지니까 신비로운 공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도에 표기된 ‘기성초등학교 원정분교장(폐교)’. 폐교가 궁금해서 안 가볼 수가 없었다. 곧바로 열린 공간, 하~~ 신비로움과 살짝 공포스러움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운동장이던 곳은 웃자란 잡초와 잡목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뒤가 학교건물이었는데, 기와지붕이었다. 그제서야 운동장을 둘러보니 지붕있는 건물이 많았다. 학교 참 특별했군, 생각하던 찰나 낡은 팻말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한밭한옥직업전문학교.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은 원정분교가 1997년 폐교·통합된 뒤 2012년 폐교 부지에 한밭한옥직업전문학교가 설립돼 운영됐었다. 기와지붕이 학교 건물에 얹혀져 있고 운동장에 지붕 건물이 많았던 이유, 그제서야 비밀이 풀렸다. 이곳도 방치하기보다 원정역과 연계해 문화공간으로 활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곳에서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과 ‘효자 정재수’ 동상을 오랜만에 봤다. 기분이 더 묘했다.



#5. 잘못된 이정표
시골길 따라 다시 걷는다. 길옆에 맑은 냇물이 흐른다. 후곡천이다. 참 예쁘다, 감탄사가 나오는 작은 냇물이다. 자박자박 걷다보니 ‘송준길의 묘 400m→’ 이정표가 나온다. 다 왔구나,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긴다. 10여 분 걷는데 뭔가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지도 앱을 열어 위치를 확인한다. 이럴수가, 반대편 길을 걸었던 거다. 분명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왔는데…. 다시 갈림길. 오른쪽으로 가라는 이정표 아래 ‘동춘당선생묘소 ←’ 방향표지석이 비로소 보였다. 아 이런. 반대방향을 가리키는 잘못된 이정표. 대전시 담당부서는 하루빨리 바로 잡아주시길. (대전시 문화유산과에서 연락이 바로 왔습니다. 이정표 바로 잡았다고. 나사가 빠진 상태에서 바람이 불어 이정표가 돌아갔다고 하네요. 문화유산돌봄사업단이 빠르게 조치 완료했다고 사진과 함께 알려왔습니다. 빠른 조치 감사드립니다)
갈림길에서 4분 뒤 커다란 느티나무 보호수를 만난다. 수령 250년이 넘은 또다른 보호수. 그 옆에 ‘동춘당선생묘소 ←’ 표지석이 또 있다. 다 왔구나. 동춘당 묘 가는 길은 야트막한 오르막이었다. 수려한 소나무들이 입구를 만들어 길손을 맞이했다. 규모가 어마어마한 동춘당 선생의 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였기에 왕릉처럼 컸다.

충남 연기에 있었으나 후에 공주 등 여러 곳으로 옮겨졌다가 숙종 26년(1700)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묘비는 이곳으로 이장한 후에 세워진 것으로, 외손자인 판서 민진후가 글을 짓고 증손자인 현령 송요좌가 글씨를 쓴 것이라고 한다. 바로 아래에는 그의 아들 송광식의 묘도 있다.
#6. 영화 ‘클래식’
방학을 맞아 시골 외삼촌네 놀러온 준하(조승우)는 친구들과 냇가에서 놀다가 소달구지를 타고 지나가는 주희(손예진)를 보게 된다. 준하와 주희가 처음 만난 그곳. 그 장면을 촬영한 곳이 원정동 두계천이다. 주희와 준하가 ‘소나기 에피소드'를 찍은 뒤 반딧불이에 포위됐던 그곳. 반딧불이가 밤하늘을 수놓던 섶다리가 있던 곳도 이곳이다. (섶다리는 어느 해 태풍으로 유실되었다고.) 반딧불이 춤추는 불빛 속에 준하와 주희의 풋풋한 이야기가 흐르던 강가로 간다.
원정구름다리를 건너 두계천 물길 따라 걷는다. 20여 분 걸었을까, 세편이마을 지나 정뱅이마을로 향하는 길 두계천 모퉁이. 그곳이 그곳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섶다리도 사라지고 지형도 많이 바뀌었지만 영화 속 그 바위는 지금도 그대로다. 섶다리는 아니어도 작은 구름다리 하나 만들어놓으면 그 역시 인기 포토존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길에 서면 플레이리스트 흥얼흥얼. ‘너에게 난 나에게 넌’보단 ‘사랑하면 할수록’을 부르게 된다. (부활 노래 사랑할수록 아님, 푸른하늘 유영석이 만들고 한성민이 부른 노래다. 이 노래는 다양하게 편곡돼 영화 전체를 이끄는 BGM이 됐다.) 애초 감독은 메인 OST로 사이먼&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를 계획했는데, 개봉 직전 폴 사이먼이 반대해서 유영석 곡과 자탄풍 노래로 커버했다고. 개인적인 생각은,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은 듯하다. OST 앨범에 실리진 않았지만 델리스파이스의 ‘고백’도 스토리를 이끄는 백미다. ‘중2 때까진 늘 첫째 줄에~’로 시작하는 이 노래 가사의 화자가 3명이란 이야기는 아는 사람은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다.

#7. 앗, 수달이다
시나브로 날이 저물고 있다. 오늘 걷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클래식 촬영지 근처 보 앞에서 꽤 오랜 시간 서성인다. 석양을 배경으로 영상과 사진을 찍는다. 무심히 흐르는 물 앞에서 물멍에 빠져들었다. 그때였다. 노을빛 비치는 물가 수로 앞에서 불규칙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뭐지, 역광이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수.달.이.다.
서둘러 휴대폰 카메라 줌을 당긴다. 조금만 더 오래 있어라, 오래 있어라. 조금만 더... 흥분된 감정 감추지 못하고 찍어댄다. 눈 깜짝할 사이 수달은 물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찍은 사진을 확인한다. 아쉽다. 거리가 꽤 되고 역광이긴 했지만 아쉽다. 좀 더 침착했더라면... 제법 큰 물고기를 입에 물고 클래식 촬영지 방향으로 사라진 수달. 그리고 몇분 뒤, 그 큰 물고기를 벌써 해치운 걸까. 수로를 통해 다리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수달. 나도 황급히 추격에 나서본다. 앗, 저기 있다. 얼굴만 내밀고 배영으로 멀어져 가는 녀석.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듯한 표정. 나 잡아봐라~. 아, 짧은 만남 아쉬운 이별. 반가웠다 친구야.




#8. 어둠, 그 별빛
두계천 갑천 합류지점 안쪽 정뱅이마을을 지나 버스를 탈 계획이다. 원정동에서 용촌동으로 왔다. 그 경계의 정뱅이마을. 지난해 수해를 입어 의도치 않게 많이 알려졌지만 10여 년 전 ‘100년 후에도 살고 싶은 농촌’을 목표로 여러 실험을 시도했던 곳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희미해진 담벼락 벽화처럼 지금은 다시 평범한 농촌마을이 되고 있었다. 아쉽다.
갑천 위를 지나는 정뱅이다리를 지날 때쯤 어둠이 짙게 바뀌었다. 5분 남짓 걸어 도착한 용촌1통 정류장. 커다란 용촌동 보호수 느티나무 옆에서 23번 버스를 기다린다. 조용한 농촌마을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노래를 흥얼거린다. 김현식의 '어둠 그 별빛'.
글·사진=차철호 기자 ich@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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