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한 선비정신과 풍류, 성리학으로 엿보다

논산 돈암서원

누정은 충남지역 선비들이 풍류뿐 아니라 대국적인 의견을 나누는 장소였지만 이러한 문화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향교와 서원들 덕분이다. 향교와 서원은 현재로 치면 공립, 사립학교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 지역 선조들은 풍류는 물론 선비가 갖춰야 할 덕목 등을 배웠다. 특히 이를 통해 충남지역에서 예학이 발전돼 나라의 근간을 이루게 하는 뿌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훗날 철폐령 등으로 적지 않은 향교 및 서원이 우리나라에서 사라지긴 했지만 일부지역에서 아직까지 훌륭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논산의 돈암서원의 경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이어 잠재적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대상으로 올랐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상태이며 향교 역시 지역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많다.

당진향교
목천향교
◆기본교육을 담당하던 충남의 향교
향교는 정부가 각 지방에 세운 현재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공자를 비롯한 선현을 봉사하고 사서오경을 비롯한 유교경전을 강학하던 곳이다. 향교의 생도는 서울의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서 반드시 합격해야 했으므로 향교교육은 대부분 소과에 응시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충남지역에도 적지 않은 향교가 있는데 36개가 존재하고 있다.

향교가 성균관에 들어가기 위한 공간이라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향교는 성균관의 그것과 비슷한 배치를 보이고 있다. 공자를 모시는 문묘(文廟)가 반드시 존재하고 문묘는 다시 공자와 제자, 현인들의 위패를 봉안한 동무와 서무로 구성된 묘당과 교육을 위한 강학장 등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구성됐다.

충남의 향교 역시 이러한 배치를 잘 따르고 있으며 강학공간을 전면에 두고 묘당을 후면에 두는 것을 ‘전학후묘(前學後廟)’라 부른다. 향교 내 배치는 전국적으로 비슷하지만 충남의 향교는 진입 유형에서 다른 지역과는 차이를 보인다. 대개 향교의 진입로는 물을 건너거나 다리를 건너고 문을 지난 후 계단을 오른 다음, 누각을 지나가는 복합적인 형태를 보이지만 충남의 향교는 매우 단순하다. 전면의 계단으로 올라가 문을 지나는 것이 다인 경우가 많다. 가끔 계단을 오른 후 누각을 지나는 진입형태도 있지만 과정이 단순하다. 이는 불교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온갖 역경을 이겨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충남지역의 향교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간결하지만 의미가 담겨 있는 선비들의 유형과 비슷하다.

대표적인 것이 당진향교로 지난 1997년 12월 23일 충남도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됐다. 부지 면적은 1798㎡, 건평 245㎡, 담장 길이 45m로 1407년 유현(儒賢)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됐다.

천안에 위치한 목천향교는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나 후에 다시 세우고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으며 참봉 한혁(韓赫)이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이들 향교는 지역민들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워졌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향교를 다니며 학문을 배웠고 예학의 근원지답게 학문을 배우는 문화가 어쩌면 향교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국가로부터 전적(典籍)과 노비·전답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치는 등 기본교육의 산실 역할을 했지만 대부분 갑오개혁 이후 교육적 기능은 사라졌다. 이후에는 1894년 과거제도의 폐지로 인해 조상들을 모시는 곳으로 역할이 축소됐다.

◆고등교육 역할이자 예학 풍을 발전시킨 충남의 서원
고려 때부터 생기기 시작한 향교가 쇠퇴해지기 시작할 때쯤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서원이 점차 한반도에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 사학(私學) 교육의 전형으로서 주변 경관과 조화되는 한국 특유의 공간유형과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제향의례와 강학 및 사회교육 등 서원 본연의 기능을 오늘날까지 수행하고 있는 탁월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서원은 당시 지성의 집회소(集會所)로서 서적과 판본의 유통과 확산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특히 제향의식은 동아시아 서원 관련 유산 중에서 가장 완비된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

충남의 서원들은 성리학, 예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가장 유명한 서원은 잠재적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대상에 오른 논산에 위치한 돈암서원으로 면적은 5590㎡이다. 1634년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예학파(禮學派) 유학자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고 1660년에 사액(賜額)된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보존된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역 내에는 강당·동재·서재·사우(사당)·장판각(藏板閣)·양성당(養性堂) 등 건물 10여 동과 돈암서원비·관리사 등이 있다. 이 중 사우인 유경사에는 김장생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그의 아들 김집(金集), 노론의 거두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 등이 배향됐다.

서천에 있는 문헌서원은 1594년에 지방 유림들의 공론으로 이곡(李穀)과 이색(李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1610년 한산(韓山)으로 옮겨져 복원됐고 1611년에는 문헌(文獻)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 후 이종학(李種學), 이자, 이개(李塏)가 추가돼 모셔지고 있다. 서원 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2층 누각으로 된 6칸의 강당, 4칸의 진수당(進修堂), 3칸의 목은영당, 5칸의 재실(齋室), 3칸의 전사청(典祀廳), 3칸의 수호사(守護舍),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목은선생 신도비, 이종덕 효행비각 등이 있다.

사우에는 성리학의 대가인 이색·이곡과 이종학·이자·이개·이종덕의 위패가 봉안돼 있어 충남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죽림서원은 예학의 대부 김장생을 비롯해 그의 스승인 율곡 이이를 모시고 있는 곳으로 1665년‘죽림’이라 사액되면서 서원으로 승격했다. 이때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까지 배향했다. 이어 1695년(숙종 21)에는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다. 이곳은 1653년(효종4년) 송시열과 윤선거((尹宣擧)가 만나 주희(朱熹)의 사상을 비판하고 개혁적 사상을 가진 윤휴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곳이다. 윤휴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사서의 경전을 주희와는 다르게 해석을 내렸는데 주희의 해석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송시열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지만 윤선거는 경전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윤휴의 학문이 높다고 평가했다. 이는 두 사람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됐다. 1871년 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정비 때 훼철된 바 있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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