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복음 전파…'신앙의 꽃' 피워낸 성지


사대부가 득실했던 시대에 서쪽에서 온 종교를 쉽게 받아들인 곳도 역시 충남지역이다. 조상을 섬기는 유교사상이 강한 한반도에 성모 마리아상을 앞세운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당시 사회상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남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믿음을 관철시켜 충남지역을 국내 천주교의 성지로 만들었다. 천주교는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폭 넓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성호학파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당시 성호학파는 천주교를 하나의 학문으로만 인식했다. 그러다가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제자인 녹암 권철신(鹿菴 權哲身)과 그 제자들에 의해 점차 새로운 신앙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현 예산 인근인 여사울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충남에서의 천주교 역사가 시작됐다.
천주교를 학문으로의 접근이 아닌 종교로의 접근이 시작되면서 충남지역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자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충남지역에서 천주교를 전파한 인물은 1752년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으로 1784년 중국에서 천주교를 접하고 가르침을 따르던 만천 이승훈(蔓川 李承薰)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고향에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세례식은 한반도 역사에서 최초였고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라 불릴 정도로 후대 천주교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를 시점으로 국내 천주교의 역사가 꿈틀이기 시작했다.
이존창의 활동은 곧 내포공동체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차령산맥 동쪽으로 복음이 확대되면서 신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자연스레 종교모임을 갖게 됐다. 이는 내포교회로 발전했고 교통의 중심지였던 예산지역의 특성상 천주교의 가르침은 점점 멀리 퍼져갔다.

천주교가 널리 퍼지면서 조정은 천주교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유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해가 지는 나라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양반 등의 시각에서는 용납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는 이존창과 내포교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결국 조정에서 천주교를 목표로 한 박해가 시작됐다. 천주교를 숙청키 위한 신해박해(辛亥迫害)가 1791년 발생했고 당시 천주교의 핵심 인물로 꼽히던 이존창은 공주에서 체포돼 감영의 옥에 갇히게 됐다. 그의 지인이 상소를 통해 ‘천주교를 버리겠다는 이존창의 진술을 받았다’며 용서해 달라고 했고, 그는 출소하는 대신 평민의 신분으로 살게 됐다.
이처럼 신해박해로 인해 이존창이 타격을 입자 내포교회 역시 어려움에 처했지만 예산을 비롯한 당진 등 서해안 지역은 이미 천주교의 가르침 아래 있었다.
그러자 다시 조정은 1795년 말에 이르러 지방 관리들에게 이존창을 체포토록 했고 정조의 명으로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옥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석방됐으나 1801년 다시 체포된 후 서울로 압송돼 공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뜻은 이후 김대건이 이어갔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는데 증조부인 김운조를 비롯해 조부이자 이존창의 딸과 결혼한 김택현 등이 김대건 집안 출신들이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기에 김대건의 가족들은 모두 박해를 받았다. 김운조는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했고 김대건의 작은아버지인 김종한은 1799년 경부터 경상지역로 이주해 생활하다가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돼 이듬해 대구에서 순교했다. 이 외에도 작은할아버지 김한현, 그리고 김한현의 딸인 당고모 김 데레사와 그의 장부인 당고모부 손연욱 역시 순교했다. 천주교 모태신앙인 가풍은 김대건으로 이어졌고 그는 자연스레 천주교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대건은 이후 프랑스의 피에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면서 천주교는 충남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는 강경 부근의 황산포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펼쳤고 천주교는 서울과 경기지역까지 활동 폭을 넓혔다. 하지만 그 역시 1846년 5월 14일 황해도에서 중국 배에 편지와 조선지도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됐고 같은 해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다음 날 참수됐다.
◆천주교의 성지가 돼 교황이 방문한 충남
이존창과 김대건이 눈을 감으면서 충남지역에서의 천주교는 사라질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신자들은 오히려 더욱 포교활동에 전념했다. 이 과정에서 성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물리적이면서 상징적인 것이 들어서자 충남은 천주교의 상징성을 지니기 시작했다.
이중 가장 대표적이고 전국 성당 중 가장 아름답다는 아산 공세리 성당은 당시 해당 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드비즈 신부가 마을의 민가를 교회당으로 사용하다 1897년 옛 곡물창고에 사제관을 세우고 1922년에는 자신이 직접 설계해 만든 것이다. 천주교 초기 본당 중의 하나이다.
당진성당 역시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성당이다. 과거 이존창이 태어난 예산에 위치해 있다가 189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명칭도 합덕성당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신축된 것인데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양식으로서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연와조 구조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1961년 합덕읍 운산리에 신합덕성당이 생겨 잠시 구 합덕성당으로 불리다가 1997년 다시 합덕성당의 명칭을 되찾았다.
이처럼 충남지역에 두 신부가 적극적인 천주교 포교활동을 하고 상징적인 성당들이 들어서면서 충남은 순교자의 지역으로 불리기도 했고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충남을 방문하면서 그 상징성은 더욱 커졌다.
천주교가 충남에서 큰 박해를 받았지만 결국 그 박해를 모두 이겨내고 신앙심이 관철되면서 천주교는 충남을 대표하는 종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 뜻을 이어가는 모습은 흡사 백제의 그것과도 닮았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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