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시대 아우른 선비정신의 뿌리


예학의 기본이 되는 유학은 충남에서 가장 먼저 시작돼 예학으로 발전한 것을 볼 때 유학은 충남이 본고장으로 봐야 하고 충남의 종교로 보는 것이 맞다. 유학이 어떻게 예학으로 발달했는지 다섯 차례에 걸쳐 살핀다.
◆충남에서의 유교
유학은 중국의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전통적인 학문이다. 요(堯), 순(舜)으로부터 주공(周公)에 이르는 성인(聖人)을 이상으로 하고 인(仁)과 예(禮)를 근본 개념으로 한다. ‘과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으로 당시 중국은 유학을 중심으로 국가를 꾸렸다. 중국은 극동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국이었기 때문에 한반도와 열도에 유학이 전파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한반도는 중국 본토의 유학보다는 유학의 분파인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성리학이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 계기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1289년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간 안향이라는 인물이 주자전서를 가지고 입국한 것이 시초가 됐다는 설이 있고 또 다른 이야기로는 1237년 몽고의 침입으로 남송이 망할 무렵 송나라의 유학자인 정신보가 고려 간월도에 망명 후 자신의 아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현재는 후자의 이야기가 더 주목받고 정설로 받아들여지고는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자료가 부족한 상황이다. 어찌됐든 고려 때 성리학이 도입됐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성리학이 한반도에 도입되긴 했지만 당시 한반도는 철저한 불교국가였다. 때문에 곧바로 성리학이 불교를 대처하지는 못했지만 당대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지지하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보령 출신의 백이정이 성리학에 관한 책과 주자의 ‘가례(家禮)’를 구해 귀국한 후 이제현과 박충좌, 이곡, 백문보 등 문인들을 배출했다.
이후 이제현의 문인인 이곡이 성리학 전파에 많은 공을 세웠고 이곡의 아들인 이색 역시 정몽주, 길재와 더불어 성리학에 있어 으뜸이라 불릴 정도로 적지 않게 노력했다. 특히 이색 등은 성리학을 피상적 차원을 넘어 성리학이 정치적·사상적 토대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유학을 근간으로 한 국가의 탄생
이같이 적지 않은 충남 출신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지지하면서 고려 멸망 이후 이성계의 측근들이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의 건립을 촉구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드라마로도 알려진 정도전이다. 정도전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을 익혀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한 향리 출신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 정신에 입각해 정책을 제안했다. 또 그들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성리학의 정명적(正名的) 명분 의식에 기초해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면서 배원친명(排元親明)의 외교정책, 정방제(政房制)의 폐지, 토지 제도의 개혁 등에 힘썼다. 그러면서 이성계에게 불교에 입각한 고려가 아닌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고 설득했다.
이성계는 나서는 전투마다 불패를 자랑하는 장수이자 인재를 아끼는 모습으로 부하들에게 신망을 받는 장수였다. 하지만 변방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항상 최영에 이은 2인자로 마음고생이 많았다.
당시 동아시아의 상황은 강력했던 원(元)나라가 몰락하면서 정치질서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고려도 이러한 국제 정세에 맞춰 국가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요동지역에서 홍건적의 공격 등으로 인해 고려가 적지 않은 피해를 받아 요동 정벌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공민왕 역시 1369년과 1370년 두 차례에 걸쳐 요동(遼東) 지역의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며 북진(北進)의 의지를 보였다. 이에 이성계는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성계는 더운 날씨에 군사를 이끄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판단해 위화도 근처에서 회군을 했고 정도전 등과 함께 수도로 돌아와 곧바로 성을 함락시켜 고려를 멸망시켰다. 성리학을 기초로 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되는 순간이다.
◆불교를 배제한 정도전과 성리학 보급으로 토대 구축한 권근
성리학이 조선의 개창을 합리화하는 토대가 되면서부터 조선시대 사상의 중심부로 부상했다. 조선 건국에 힘을 보탰던 정도전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조선조의 기틀을 확립해 나가면서 철저히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고려 초의 최승로(崔承老)나 고려 말의 이제현·이색 등도 불교를 배척했지만, 그것은 사원의 폐해와 승려들의 비행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저술해 불교신앙의 허구성·미신성 및 불교이론 자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불교를 비판했다. 또 불교에서 윤회를 주장해 현실을 벗어나 사후 세계를 논의하는 것도 꾸짖었다. 성리학이야말로 이러한 불교의 폐단을 시정해 사회 윤리를 강화하고 국가에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참된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뜻에서 그는 성리학을 가리켜 “옛사람들의 덕을 밝히고 국민을 새롭게 하는 실학이다”고 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공신인 권근은 정도전처럼 불교를 배척하기 보다는 성리학 발전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해 자연스레 성리학이 보급되는데 힘썼다. 권근은 불교에 대한 비판보다는 성리학 연구에 몰두해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등을 저술했고 ‘입학도설’을 만들면서 누구나가 성리학에 쉽게 입문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권근은 이 책의 맨 앞에 있는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에서 인간(人)·심·성에 대해 설명하며 천인합일이라는 유학적 이상을 심성의 수양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불교는 배제되고 성리학은 널리 보급되면서 많은 이들이 관직을 차지하기 위해 성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조선 건국의 공신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성리학을 발전시키면서 국가의 통치 이념을 건립함에 따라 성리학은 관학(官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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