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다

성리학에서 실천을 강조하면서 예학으로 발전시킨 사계 김장생
충남의 유학이 성리학 보급에 힘썼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되면서 성리학을 배우기 위한 선비들이 많아졌다. 여말에 이르러 국교인 불교가 타락하면서 성리학의 발전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실천을 강조하는 성리학은 점점 발전하면서 실천의 중요성에 더욱 무게를 두게 됐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의 단계까지 도달하게 됐다, 그래서 도출된 답은 예(禮)로 이를 통해 세상의 질서가 정해진다는 점을 볼 때 예를 가르치는 학문인 ‘예학(禮學)’이 새로이 등장하게 된다. 이 예학은 성리학보다 한 단계 높은 인간다움을 요구했고 이를 집대성한 인물인 김장생이 충남지역에서 배출됐다. ‘예학=충남’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성리학에서 예학으로
16세기 한반도에서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규명했다면 17세기 들어서는 시대변화와 함께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인간의 성리는 반드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실천돼야 한다고 볼 때 그것은 다름 아닌 예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 예학으로서의 이행은 자연스러운 시대적 요청이었다.

특히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란과 더불어 광해군의 패륜 등 인륜질서가 무너지는 상황도 예학이 대두되는 시발점이 됐다.

우리나라 예학은 연원이 오래지만 기호예학의 선구자는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이다. 이들은 경기지역에 연고를 두고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들 문하에 김장생이란 인물이 가장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김장생의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1548년 한양 정릉동(貞陵洞·현 서울 중구 정동)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기는 했지만 성년이 될 때까지 비교적 평범하고 순조롭게 성장했다.

이 시기에 그의 주요한 학문적 스승은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 토정 이지함(土亭, 1517∼1578) 등이었다. 이 중 송익필은 서출이라는 약점 때문에 급제나 출사는 하지 못했지만 성리학, 특히 예학을 깊이 연구한 인물로 김장생의 학문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또 정치적 역량도 뛰어나 서인의 숨은 실력자로 평가됐다.

김장생은 12세 때 송익필에게서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등을 배웠으며 20세 무렵에 이이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고 이후 이지함을 찾아갔다.

김장생은 훗날 자신의 스승인 이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스승은 성리학의 공은 매우 높지만 실천하는 학문에는 미진했다”고 했다. 감히 스승을 평가한 것이 아닌 스승의 부족한 점을 자신이 잇겠다는 의지로 김장생은 성리학보다 예학에 더 뜻을 두고 학문에 전념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공부한 김장생이었지만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큰 특징 없이 지냈다는 점이 특징이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동생이 관련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하기 시작하면서 충남에서 예학이 막 태동하기 시작했고 아들인 김집과 함께 송시열 등을 배출하고 예학을 강조하면서 호서예학의 전성기를 열기 시작했다.

◆스승의 가르침과 후배들의 비판을 수용해 예학을 가르치다
김장생은 정밀한 고증을 통해 예 시행을 뒷받침하는 본원을 정립키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가 저술한 ‘가례집람(家禮輯覽)’과 ‘의례문해(疑禮問解)’는 조선의 예서 가운데 학문적 여건을 구비한 초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며, 예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방향을 제시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김장생은 당시 한국의 실정에 맞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 국가 전례(典禮)를 인용하고 이황·김인후·송익필·이이 등 선배 스승은 물론 후배나 동학의 예설(禮說)까지 모두 비판적으로 수용해 한국 예학의 기초를 수립했다.

또한 그는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정신을 계승하여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일상생활의 의칙(儀則)으로 정립 보편화했고,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사대부의 예제를 본받아 실행하게 됐다.

김장생은 사례(四禮) 가운데에서도 가장 어려운 상례(喪禮)와 제례(祭禮) 문제에 대해 시의(時宜)에 맞도록 예(禮)를 정립해 예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김장생은 예제(禮制)가 불변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사회의 양상이 변화함에 따라 현실의 실상과 이상의 명분이 어긋나게 되므로 변혁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는 주자의 예설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이적시하는 정통적인 측면에서 볼 때 굉장히 혁신적인 일이었다. 김장생에 의해 충남의 예학은 딱딱하지 않고 오히려 시의성을 강조해 다양한 변화를 줬다.

이는 중국과 다른 조선, 특히 충남지역 나름의 자주적인 성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김장생은 가례(家禮)에 입각해 관혼상제를 준행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가례 준행은 가례에 기록돼 있는 예제의 의장도수(儀章度數)를 맹목적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먼저 가례의 예제에 담긴 의리(義理)와 정문(情文)과 명분(名分)을 이해하고 준행해야 바른 실천이 된다는 의미를 강조했다. 다만 저명한 예가 등을 기준으로 사용함으로써 본래의 의도는 절대 잃지 않도록 하는 균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송시열은 예학의 대부인 스승 김장생의 업적에 대해서 ‘율곡을 이어 동방도학(東方道學)의 계통을 열게 했다’고 말하고 특히 그의 예학에 대해서는 ‘율곡이 문왕의 치(治)를 이룬 것이라면 김장생은 주공의 제례를 이룬 것에 비견된다’고 평했다. 스승인 송익필은 ‘예 정신이 인정과 예를 조화시켰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강하고 보수적이기만 한 성리학이 시의적이고 유연한 예학으로 충남지역에 발전하면서 충남은 예학의 본고장이 됐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관련기사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