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vs 능동…닮은 듯 다른 기호유학의 두 거목


충남지역에서는 기호유학이 성리학, 예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율곡학파와 우계학파로 나뉘게 됐다. 두 학파는 비록 뿌리는 같으면서도 약간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율곡학파가 성리학을 계발하는 정통적인 순리를 따른다면 우계학파는 성리학에만 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을 비판하고 수용하는 능동적이고 유연한 모습을 보인다.
율곡학파와 우계학파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리고 두 학파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한국의 유학은 크게 보면 기호유학과 영남유학으로 나뉘어 전개되고 기호유학은 다시 율곡학파와 우계학파로 나뉜다. 두 학파의 중심은 공통적으로 충남지역이 중심이다.
율곡학파는 율곡의 학에 직접 닿아있거나 또 율곡의 철학정신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학맥이다. 퇴계의 성리학을 고봉 기대승이 비판했고 우계 성혼이 퇴계의 학설에 동조하자 율곡이 이를 비판함으로써 영남과 학술적 경쟁과 대립이 시작됐다.
율곡의 대표적 문인으로는 사계 김장생과 중봉 조헌이 있다.
연산 출신인 김장생은 아들인 김집과 더불어 ‘동국 18현’으로 추앙됐으며 이후 예학의 대부가 된다. 율곡학파에서 김장생이 중요한 이유는 율곡학파의 중심지를 충남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의 문하생들은 모두 관료로서 이름을 날렸는데 송시열과 송준길, 이유태 등이 대표적이다.
또 율곡학파가 충남지역에서 크게 융성한 것은 송시열의 역할이 컸다. 그는 회덕 출신으로 17세기 조선 유학계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 후 북벌의지를 실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고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의 문하엔 권상하, 윤증, 김만중 등이 있다. 송시열의 율곡학파 계승 정신은 제자인 권상하가 있었고 그는 충북 제천지역을 중심으로 강학하면서 여러 제자를 배출했다. 이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냐, 다르냐’라는 심오한 주제로 논쟁을 벌이면서 성리학을 발전시켜 율곡학파를 만들었다.
이외에도 직접 이들에게 배우지는 않았지만 율곡의 학설을 지지하고 존경해 온 학맥이 있는데 이단상을 필두로 임영, 김창협 등이 있다. 또 이재를 스승으로 한 김원행 등도 율곡학파에 속한다.
앞서 설명했던 인물들은 모두 충남 출신으로 율곡학파가 충남지역에서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율곡학파의 특성은 무엇일까.
첫째는 성리학을 계발하고 옹호하는데 주력한다는 점이다. 율곡학파는 퇴계학파가 율곡의 성리설을 비판해 오자 이에 대한 대응에 주력한다. 퇴계와 율곡의 쟁점이었던 리(理)의 발용문제,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성리학적 해석문제 등이 주로 논의됐다. 그러므로 율곡학파는 율곡철학의 근간이었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논리개발과 함께 퇴계의 리발(理發)을 비판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또 인간의 심성에 대한 논의에서도 퇴계의 도덕적 인간관에 대해 율곡의 천인적 인간관을 적극 옹호했다.
둘째는 경직된 학문 경향이다. 율곡학파가 퇴계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학문에 비해 좀 딱딱한 면이 없지 않다. 자연스레 율곡의 설을 교조적으로 지키게 되다 보니 보수적 색채가 짙어진 것이다. 반면 현실참여엔 적극적이었다. 유학 자체가 개인적 수기로부터 사회, 정치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때 어찌 보면 충남지역의 유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율곡학파라고도 볼 수 있다.

우계학파는 우계 성혼을 중심으로 한 갈래이다. 성혼은 율곡의 학문적 동지로 학문과 실천이 훌륭해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성혼의 문하엔 윤황과 조헌, 안방준, 이시백, 황신, 정엽 등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그의 부친은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은 인물이다. 자연스레 학문에 뜻을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혼의 학문은 사위인 윤황에게 이어졌고 그의 아들인 윤선거, 손자인 윤증 등이 이어갔다. 당시 윤증은 송시열의 촉망받는 제자였고 뛰어난 명성에도 불구하고 관료의 길로 접어들지 않으면서 ‘얼굴없는 재상’, ‘백의정승’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논산 출신인 윤증은 송시열과 더불어 가장 영향력이 있던 유림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의 문하엔 박태보, 민이승, 정제두, 한영기 등이 있다.
이처럼 촉망받던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비방하며 적대시하게 된 원인은 당시 최고의 석학으로 평가됐던 윤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와 송시열 사이에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윤선거는 윤증의 아버지였지만 송시열은 그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했다. 송시열과 윤증은 또 이념적 차이로 인해 사제관계까지 끊어지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고 학파로는 율곡학파와 우계학파로 분류됐다.
우계학파가 율곡학파와 다른 점은 개방적인 학풍이다. 영남유학에 비해 기호유학이 개방적이라면 기호유학 내 율곡학파에 비해 우계학파가 더 개방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성리학에 있어서도 율곡의 학설에 얽매이지 않고 퇴계의 학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절충적 성격을 보였다. 특히 퇴계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됐던 양명학을 주도적으로 받아들였고 윤휴 등은 주자의 권위에 구애되지 않고 경전 해석을 했으며 도가철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둘째는 내면적인 자기수양을 추구했다. 우계학파는 적극적으로 벼슬에 나아가 현실을 바로잡거나 정책을 펼치지 않고 물러나 재야에서 학문과 인격을 닦아 유교적 모범이 되고자 했다. 또 무실(務實)학풍을 추구했다. 이는 율곡과 성혼이 동시에 강조한 것으로 내실과 실천, 실용을 추구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학풍은 양명학이나 개화사상의 철학정신으로 계승됐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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