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륜질서·나라 기강 바로잡은 시대적 요청


예학의 그 연원은 오래지만 기호예학의 선구자는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이 꼽힌다. 이들은 경기지역에 연고를 두고 매우 친밀하게 왕래했다고 알려진다. 이들 문하생이었던 사계 김장생이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는데 특히 예학에 더 큰 뜻을 두었다. 훗날 김장생은 율곡에 대해 “스승은 성리학 최고의 경지에 올랐으나 실천하는 학문에는 미진한 과제가 있다”며 스승의 미진한 점을 자신이 발전시켜야 한다는 책무로 삼고 예학에 평생을 바쳤다.
송익필 역시 김장생에게 ‘주자가례’의 연구에 관해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송익필의 가례 주석서인 ‘가례주설’과 ‘예문답’ 등은 후일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의례문해’의 저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스승이다.
이처럼 김장생은 두 명의 스승으로부터 성리학과 예학에 대한 체계적인 수업을 통해 실천적인 학문에 뜻을 두었고 본격적으로 예학을 발전시켰다.
김장생은 아들 김집과 함께 문하생이던 송시열, 송준길 등에게 예학을 가르쳐 호서예학의 전성기를 열어젖혔다. 당시 김장생은 친구였던 신의경의 초본을 보완해 ‘상례비요’룰 완성했고 이는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가장 널리 애용된 생활예서로 손꼽히고 있다.
김집은 예 교육을 학문의 기초로 삼고 훈육해 그의 문하생들은 관혼상제의 예에 능통했다. 문하생이던 송시열과 송준길 등은 예의 적용문제에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김장생과 김집의 저술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송시열은 1000여 조항에 달하는 예문답을 남겼다.
이외에도 율곡학파 중 한 명이던 도암 이재는 조선 후기 가장 대표적인 생활 예서인 ‘사례판람’을 저술했고 금산의 유계는 ‘가례원류’라는 책을 펴냈다.
충남예학은 조선예학을 주도했고 기호예학의 중심이었을 정도로 적지 않은 인물들이 예학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이어나갔다.
이처럼 예학의 연구가 활발하게 된 계기는 불행하게도 조선에서 발생했던 양란과 더불어 백성들의 가난 등이었다. 여기에 광해의 패륜, 당쟁의 심화 등 인륜질서가 무너지면서 이를 세우기 위해서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전제됐기 때문에 조선예학은 충남에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충남에서 발전한 예학은 율곡학파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율곡학파의 특성과 비슷하다.
우선 충남유학은 가례를 중시했다. 가례는 주자의 예서로서 조선 사회의 의례에 기본이 돼 많은 영향을 미쳤다. 충남의 예학자들은 그들의 예문답서에서 주자의 예설과 함께 가례를 가장 존신했고 인용 횟수에 있어서도 가장 많았다. 이들은 주자의 예설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주자의 예설을 따르지 않는 것을 굉장히 불경스럽게 여겼다. 이 점은 영남예학과 구별되는 점이다. 이처럼 가례가 중시된 것은 그것이 지니는 시의성과 실용성에서 비롯되는데 당시 가례는 미완성된 예서여서 학문적 고증이 필요하다는 단점을 가졌다. 검증작업에는 ‘의례’와 ‘예기’가 주로 사용됐다. 즉 가례를 중심으로 예학을 실천하면서 미비점을 보완하고 검증하는 작업엔 고례가 적극 활용됐다.

이처럼 딱딱한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충남예학의 유연적인 모습도 보여주는 것이 두 번째 특징이다. 주자의 예설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이적시하기는 했지만 충남예학은 시의성을 중시하고 인정과의 조화도 추구한 것이다. 김장생의 스승인 송익필은 ‘김장생의 예정신이 인정과 예를 조화시켰다’고 했을 정도로 김장생이 예학을 굉장히 체계적으로 발전시켰음을 칭찬한 일이 있다. 하지만 예라는 것이 변수가 많아 김장생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변수가 항상 존재했다. 예는 본래 상황과 맞아야 하지만 갑작스러운 변례는 그 형태가 다양하고 예외적 변수가 많아 적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충남의 예학은 속례가 기본 예법에 비추어 큰 문제가 없을 경우 그 관행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이 인정에 후하고 실용적이면 이를 기준으로 삼는 유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 속례가 고례와 상충하는 경우는 시의와 정례를 고려해 조화롭게 수용했다.
충남예학의 또 다른 특징은 속례의 해석에 있어서 자주적 입장을 견지했다. 예서에도 근거가 없고 속례로써 시행되는 경우 이에 대한 해석에서 충남의 예학자들은 자신의 예 인식을 바탕으로 해석했다. 이는 중국과는 다른 학풍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이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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